부석사편지- 김영산 부석사편지 김영산 내 너무 돌아가기 급급해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산 언저리 돌아 배회하는 날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부석 앞에 당도해보니, 저 뜬돌이 여태 저를 내려놓지 않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산문 밖에서 여럿 사과밭을 지나 왔습니다. 어젯밤 폭풍우 에 붉은 사과들 뒹굴고 있..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22
조은- 따뜻한 흙 따뜻한 흙 조은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왔다 씨앗들이 내 몸으로 흐르는 물길을 알았는지 떨어지지 않는다 씨앗들이 물이 순환되는 곳에서 풍기는 흙내를 맡으며 발아되는지 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 내 몸이 낯설다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 뿌리에서 ..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17
이문재- 서신 서신 이문재 강원도의 산들은 높이를 버리고 초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초록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무들은 밤새 초록을 계곡으로 흘려보냅니다 열목어들이 쿵쾅거리는 물 속에서 눈을 크게 뜨는 아침 젖은 이부자리 개키며 바라보는 앞산 허리에는 비안개가 자욱합니다 비안개에서는 연한 박하향이 ..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03
마감뉴스- 여태천 마감뉴스 여태천 오늘 밤 내가 사는 이곳은 조용하다 막 피어난 꽃 향기가 날 듯 말 듯 바람은 불어 그 바람에게 가는 비 조금 오고 내가 사는 작은 동네에 아주 조금 비가 와서 버스는 제때 오지 않아 버스를 타지 않으리가고 굳게 마음 먹는 그런 밤이다 사실은 저 혼자 떨어져내린 명자꽃 때문이다 ..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03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윤재철 이제 바퀴를 보면 브레이크 달고 싶다 윤재철 바퀴는 몰라 지금 산수유가 피었는지 북쪽 산기슭 진달래가 피었는지 뒤울안 회나무 가ㅈ; 휘파람새가 울다 가는지 바퀴는 몰라 저 들판 노란 꾀꼬리가 왜 급히 날아가는지 바퀴는 모른다네 내가 우는지 마는지 누구를 어떻게 그리워하는지 마는지 그러..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02
하지- 박현수 하지 박현수 해가 가장 길게 혀를 빼어 지상을 오래 핥는 날 상처에 닿을 때마다 붉어지는 혓바늘 하염없이 핥아주는 것밖에 해줄 것이 없는 늙은 암캐의 혓바닥처럼 서러운 온기에 온 머리가 젖어 꿈이 맑아진 풀잎들 치유는 핥을 수 있는 따스한 거리에 있어 핥을 수 없는 곳마다 덧나는 상처들 혓바..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02
박물관-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박물관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홍조 띤 뺨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 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01
김영산- 붙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김영산 아직도, 옛 바윗돌 찬비 맞으며 산제에 놓여 있었다. 암매 장 시절이었다, 우리의 연애는 참으로 짧았고 이제 비린내 훅 풍기는 살내음 잦아들었지만 아픈 다리 끌어 벼랑까지 가지 않아도 늘 벼랑임을 알게 되었다. 당신을 울리지 못한 메아 리가 내 골짜기에도 울리다 지치.. poem/時雨의 시읽기 2009.06.27
뒷짐- 이정록 뒷짐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위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임을 이제야 알랐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 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개딜 곳 없던 등.. poem/時雨의 시읽기 2009.06.26
물의 결가부좌-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덕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 poem/時雨의 시읽기 2008.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