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이문재- 서신

shiwoo jang 2009. 11. 3. 20:05

서신

                     이문재
  

  강원도의 산들은 높이를 버리고 초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초록을 감당하지 못하는 나무들은 밤새 초록을 계곡으로 흘려보냅니다
  열목어들이 쿵쾅거리는 물 속에서 눈을 크게 뜨는 아침
  젖은 이부자리 개키며 바라보는 앞산 허리에는 비안개가 자욱합니다
  비안개에서는 연한 박하향이 나는 듯합니다
  
  처음 며칠간은 휴대폰 벨소리가 수시로 들렸습니다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는 오지에서 벨소리가 환청으로 들린 것이지요
  혼잣말을 할 때에는 손가락으로 무릎 위를 톡톡 치기도 합니다
  전원(電源)에 연결되어 있던 삶에서 벗어나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환청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향기들이 기습했습니다
  한 홉씩 코를 틀어막는 냄새들이라니요
  아픈 몸은 후각에 흔쾌해지면서 한 칸씩 몸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며칠째 국지성 호우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컨테이너를 난타하는 빗줄기가 신랄합니다
  거센 빗줄기 속에 앉아 있으면 진공 같은 고요 찾아와 숙연해집니다
  소음에서 소리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지요
  낮달이 있겠거니 하고 낮잠에 들었는데 담배 피우는 꿈을 꾸고 말았습니다
  얼굴은 생각나지 않고 부드러운 입술만 생생한 꿈처럼 뒤끝이 서글펐습니다
  국지성 호우가 철수 명령을 받으려면 며칠 더 있어야겠지요
  
  문득 솔숲을 빠져나가는 바람소리들의 굵기를 셈하다가
  내 몸이 나의 외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적잖이 난감했더랬습니다
  아직 혼자 있는 하루가 길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산맥이 초록에서 등 돌릴 때쯤이면 하루가 제법 많아질 것입니다
  군 내 버스 정류장까지 혼자 걸어나갈 수 있는 체력이 길러지면
  아마 그때는 하루가 그윽하게 깊어져 있겠지요
  그동안 저는 단절로부터 단절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어릴 때 살던 초가집을 머릿속에 다시 지었습니다
  다음번 편지에는 어둠과 소리에 관하여 주절거릴 것 같습니다
  계곡 아래쪽에서 치받쳐오는 큰바람이 일제히 나뭇잎들을 뒤집고 있습니다
  고개를 바짝 제쳐야 보이는 하늘이 분명해질 때까지
  마음들을 끄집어내 풀밭 위에 넣어놓고
  저는 충분하게 멍해져 있겠습니다
  멍하니 몸이 몸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만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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