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 고영민 우륵 고영민 1 가얏고라고 했다 사내는 그 악기를 강물에 버린 지 이 미 오래다 푸른 공명반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열두 줄, 칼로 그 줄을 차례로 끊고 통째로 강물에 던져버렸다 줄 마다 기러기발을 받쳐놓은 흐린 강물이 거듭 소리의 새 옷을 입고 태어난다 마주한 한 곡조가 긴 꼬리지..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3.08
모과불- 고영민 모과불 고영민 설풋한 모과 하나를 주워다가 책상에 올려놓았다 저 흉중에도 들고나는 것이 있어 색이 돋고 향기가 났다 둥근 테두리에 들어있는 한켠 공중 가끔 코를 대고 흠, 들이마시다보면 어릴 적 맡은 어머니 겨드랑이 냄새가 났다 모과의 얼굴 한쪽이 조금씩 썩기 시작했다 모과 ..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3.08
달팽이 약전- 서정춘 달팽이 약전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 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없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이 있었다.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3.08
의문들- 심보선 의문들 심보선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들여 쓰다음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제나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 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3.04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 이정록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이정록 백 대쯤 주고는 엉덩이를 얻어맞은 암소가 수렁논을 갈다 말고 우뚝 서서 파리를 쫓는 척, 긴 꼬리로 얻어터진 데를 비비다가 불현듯 고개를 꺾어 제 젖은 목주름을 보여주고는 저를 후려 팬 노인의 골진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긴 속눈썹 속에 ..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3.03
거리에서- 이원 거리에서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3.03
공중- 송재학 공중 송재학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 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 리고 있다 비에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 놓으니 허공이란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목덜미와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밤 의 영혼이다 ..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3.03
매화꽃 목둘레- 안도현 매화꽃 꽃둘레 안도현 수백 년 전 나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마을에 나타난 나 어린 계집 하나를 지극히 사랑했네 나는 계집을 분 盆에 다 심어 방 안에 들였네 하루는 눈발을 보여주려고 문을 열었더니 계집은 제 발로 마루 끝으로 걸어나갔네 눈발은 혀로 계집의 목을 빨고 핥 았네 계..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9
안개- 기형도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 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5
첫눈- 유종인 첫눈 유종인 어제는 슈퍼에서 말걸리 한 병 사다 마시고 홀로 잠잠히 취해 잠들었다 초저녁잠은 내처 꿈이 없었다 아니 꿈이 있었다면 꿈에 밀려 사라졌다 땅이 다른 나라에 사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동안 기르다 죽은 고양이와 개들도 모두 물너울 저편의 섬처럼 잠겼다 이상하다 참..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