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 이윤학 제비 이윤학 제비가 떠난 다음 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 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상처를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 지어 앉아 다수..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3
어떤 문신- 유종인 어떤 문신 유종인 비가 내렸다 지하철 입구 한구석에 처마도 없이 비를 긋는 사내가 있다 옆구리 모로 누운 채 온몸에 비를 심는 사내가 있다 제 후줄근해진 몸에 비만 심었으랴 능갈맞은 창녀처럼 치큰대며 오는 비의 손목을 끌고 변변한 묵정밭 한 뙈기 없는 시골 내려가면 그대로 반가..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3
사랑을 놓치다 _청산옥에서 5 -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 청산옥에서 5 ......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8
뿔- 유종인 뿔 유종인 추운 날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뿔도장을 새기는 사내 가 있다 뜨내기손님의 이름을 플라스틱 뿔도장에 새겨넣는 소리, 그 소리가 왁자지껄 시장판 소리들 중에 제일 어린 소리겠다 생피가 돌던 뿔이 돌덩이처럼 굳어 이름 하나를 거기 심을 때까지 새로운 뿔이 산 허공에 돋아,..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8
찬란- 이병률 찬란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7
아호-유종인 아호 유종인 길바닥에 흙먼지 뒤집어 쓴 채 두부 한 판 버려져있다 콩물 속에 엉기듯 굳어가던 이름은 새벽에 도드라져 나온 몸이다 몸이 그대로 이름을 받은 두부 한 판 누군가 아귀아귀 씹어먹을 부드럽고 고소한 이름 한 모! 초당이여 유명을 달리한다는 게 별 것 아니구나 다시 못 부..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6
잘 익은 사과 김혜순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 poem/時雨의 시읽기 2011.11.12
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 poem/時雨의 시읽기 2011.10.09
등대- 이홍섭 등대 이홍섭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 poem/時雨의 시읽기 2011.08.15
이문재- 소금 창고 소금 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 poem/時雨의 시읽기 2011.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