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177

괴도- 서윤후

괴도 서윤후 저 고개 숙인 자의 표정을 알고 싶다 코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어떤 찡그림을 발명했는지 그 찡그림을 펼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 마른 헝겊으로 안경을 닦을 때 초조하게 뒤돌아 볼 때 앞은 잠시 앗아갈 것이 많아지는 세계 새장은 모란 앵무를 찾으러 떠났다* 흔들의자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처럼 그림자만 남겨지는 실내악 예열된 오븐 밑을 기어가는 벌레를 볼 때 밤새 얼마나 번성하게 될 것인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로 시작하거나 이젠 얼마 없는 이야기 고개르 들면 모자라게 된다 뜨개질처럼 멀고 먼 생활의 과로사를 시작하게 된다 어딘가 다친 모과들을 닮아 향기를 먼저 내밀게 된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된다 고개 숙인 자가 거느리는 밤 속에서 감긴 눈을 일으킬 슬픔이..

배후에 대하여_ 이상국

배후에 대하여 이상국 나는 나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거기까지가 나의 밖이다 나의 등에는 은유가 없다 손으로 악수를 꺼낸다든가 안면을 집어 넣거나 하는 그늘이다 은신처도 없지만 나의 등은 나의 오래된 배후다 제삿날 절하는 아버지처럼 구부정하고 쓸쓸한 나의 힘이다.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창비, 2021 그는, 아니 우린 참 쓸쓸한 배후를 가진 사람이군요.

혼자의 넓이_이문재

혼자의 넓이 이문재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해 질 무렵이면 나무가 제 그늘을 낮게 깔려오는 어둠의 맨 앞에 갖다놓듯이 그리하여 밤새 어둠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혼자도 서편 하늘이 붉어질 때면 누군가 안쪽으로 스며들고 싶어한다 너무 어두우면 어둠이 집을 찾지 못할까 싶어 밤새도록 외등을 켜놓기도 한다 어떤 날은 어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유리창을 열고 달빛에게 말을 걸기로 한다 그러다가 혼자는 자기 영토를 벗어나기도 한다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혼자의 넓이, 창비, 2021 혼자의 넓이가 이렇게도 크다..

등이 열린 사람- 안주철

등이 열린 사람 안주철 어느 밤이었다 경사가 쌓인 인도를 올라가는 사람의 등을 보고 있었다 어느 밤이었다 능이 열린 사람을 보고 말았다 이 세상의 구멍이 거기에 있었고 나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 등으로 어둠이 들어가고 있었다 셀 수 없었지만 어둠이 그 등을 가득 채우자 등에서 더 짙은 어둠이 쏟아지고 있었다 등이 열린 사람을 보았다 등이 열린 사람이 비탈진 길을 오르고 있었다 _ 어떤 슬픔이 있어 그는 등을 열고 있을까 그는 그의 구멍을 드러낸 채 비탈진 길을 오르고 어둠을 쌓아가고 있을까 먹먹한 슬픔 몇을 마구 삼킨 느낌이다.

터널과 터널_이성미

터널과 터널 이성미 가을로 들어가서 겨울로 나왔어. 길고 긴 기 차처럼 터널은 달라지지 않는 기차인 것처럼 있었지. 서 있는 기차에서 나는 달렸어. 기차처럼 풍경을 뒤로 밀었지. 달리는 것처럼, 의자를 타고 달렸 어. 잠깐이라도 생각을 하면 안되요. 이 어둠에 끝이 있을까. 라는 문장 같은 것. 그런 순서 로 불안을 배열하면 안 됩니다. 기차는 기차니까 길로, 나 는 그전에 늦가을비를 맞았다. 어쩌면 겨울비. 옷은 늦가을 비에 젖어 축축했고 무거웠고. 겨울비 내리던 날이라는 노랫말이 있었지, 가을비가 아니라 이건 겨울비. 그렇게 생각하면 겨울비 노래가 입 에서 흘러나온다. 신발 밑창에 달라붙는, 비에 젖은 단풍잎. 쩍, 쩍, 발밑 을 따라다니는 붉은 단풍잎. 나는 쭉, 쭉, 미끄러지며, 터널을 향해 걸었..

밤의 거리에서 혼자_ 김이듬

밤의 거리에서 혼자 김이듬 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길고 좁고 어두운 길에 사람이 엉켜 있었다 포옹인지 클린치인지 알 수 없었다 둘러 갈 길 없었다 나는 이어폰 빼고 발소리를 죽였다 발꿈치를 벼 에 대고 한 사람이 울기 시작했다 야 너무하잖아 지나는 사람 붙잡고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가려보자며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멋칫 둘러보니 행인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난 긴장하며 고개 숙여 기다렸다 이 순간 내가 저들의 생 에 중대한 판단을 내려야 하나 보다 원투 스트레이트 촌각 의 글러브가 심장을 쳤다 가로등 밑에서 편지를 읽던 밤이 떠올랐다 달을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렇게 씌어 있 던 우린 이어지지 않았다 그 젊은 연인들은 나한테 접근하 다가 둘의 그림자만 거죽처럼 흘리고 갔다 얘들아 나도 불 가피하게 ..

곰곰_ 안현미

곰곰 안현미 주름진 동굴에서 백 일 동안 마을만 먹었다지 여자가 되겠다고?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_ 그러게...여자는 본의 아니게 여자로 태어나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 그렇게도 많아 ... 왜 여자에게만 요구하지? 백날? 아린 마늘?

빛에 닿은 어둠처럼_ 조은

빛에 닿은 어둠처럼 조은 나는 오래 경계에서 살았다 나는 가해자였고 피해자였고 살아간다고 믿었을 땐 죽어가고 있었고 죽었다고 느꼈을 땐 죽지도 못했다 사막이었고 신기루였고 대못에 닿는 방전된 전류였다 이명이 나를 숨 쉬게 했다 환청이 나를 살렸다 아직도 작두날 같은 경계에 있다 _시인의 잔잔한 음성으로 이 시를 듣는다 다감하고 따뜻하고 강단있는 사람, 그의 경계가 곧 나의 경계이니 우린 여전히 작두날 위에 서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