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지- 문인수 꼭지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를 접어 감추며 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 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4.10
마음의 짐승- 이재무 마음의 짐승 이재무 몸의 굴 속 웅크린 짐승 눈뜨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수성, 몸 밖의, 죄어오는 무형의 오랏줄에 답답한 듯 벌버둥치네 그때마다 가까스로 뿌리내린 가계의 나무 휘청거리네 오랜 굶주림 휑한 두 눈의 형형한 살기에 그대가 다치네 두툼한 봉급으로 쓰다듬어도 식솔의 안전으로 얼..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26
마음의 오지- 이문재 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이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호낮 남아 내 안을 들여다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26
절하고 싶었다-황동규 절하고 싶었다 황동규 십오 년 전인가 꿈이 채 어슬어슬해지기 전 바다에서 업혀온 돌 속에 숨어 산 두사람의 긴 긴 껴안음 얼마 전 거실에서 컴퓨터 책상으로 옮길 때 비로소 들킨 마주 댄 살들이 서로 엉겨 붙은 껴안음보다 더 화끈한 껴안음. 그만 절하고 싶었다 색연필 찾아들고 그 모습 뜨려다 그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20
기차는 간다- 허수경 기차는 간다 허수경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오 나 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꽃진 자리 상처가 아물지 못한 자리, 상처를 가벼이 흘려버리..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13
수은등 아래 벚꽃- 황지우 수은등 아래 벚꽃 황지우 사직공원 비탈길, 벚꽃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때 그 아래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12
흰밤- 백석 흰밤 백석 옛 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어쩐지 뒷이야기가 무성하게 많을 것 같은 이 한편의 시에는 한권 분량의 소설일 수도 있을 것 같은, 한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도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11
탁족- 황동규 탁족 황동규 휴대론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 입을 때 흔들어도 안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10
선운사- 박세현 선운사 박세현 동백꽃 보겠다고 떠난 길 인간적으로 굽어지던 호남고속도로 위에 때마침 분분하던 벚꽃 이파리들 마음 몇조각 흩날리며 선운사에 당도하니 일찍 핀 꽃들은 수삼 일 전에 져버렸고 방금 망울 맺힌 것들은 되레 나를 보겠노라 동동거린다 멀거니 동백꽃 떨어진 자리를 쳐다보고 섰자니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9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