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9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곧 세상 모든 꽃들이 제 몸의 은밀한 구석..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8
아직은 바깥에 있다- 황지우 아직은 바깥에 있다 황지우 논에 물 넣은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사선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입체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 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 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를 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 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맨발- 문태준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 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 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너와집 한채- 김명인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짐이나 얻어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시인학교- 김종삼 시인학교 김종삼 공고 오늘 강사진 음악 부문 모리스 라벨 미술 부문 폴 세잔느 시 부문 에즈라 파운드 모두 결강 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 내에 쌓인 두꺼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전봉래 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강-황인숙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상사몽-황진이 相思夢 상사몽 黃眞伊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농訪歡時歡訪농 농방환시환방농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그대 그리는 심정은 간절하나 꿈에서 밖에 볼 수 없어 내가 님을 찾아 떠났을 때에 님은 나를 찾아왔네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