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박현수 하지 박현수 해가 가장 길게 혀를 빼어 지상을 오래 핥는 날 상처에 닿을 때마다 붉어지는 혓바늘 하염없이 핥아주는 것밖에 해줄 것이 없는 늙은 암캐의 혓바닥처럼 서러운 온기에 온 머리가 젖어 꿈이 맑아진 풀잎들 치유는 핥을 수 있는 따스한 거리에 있어 핥을 수 없는 곳마다 덧나는 상처들 혓바..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02
박물관-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박물관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홍조 띤 뺨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 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 poem/時雨의 시읽기 2009.11.01
김영산- 붙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김영산 아직도, 옛 바윗돌 찬비 맞으며 산제에 놓여 있었다. 암매 장 시절이었다, 우리의 연애는 참으로 짧았고 이제 비린내 훅 풍기는 살내음 잦아들었지만 아픈 다리 끌어 벼랑까지 가지 않아도 늘 벼랑임을 알게 되었다. 당신을 울리지 못한 메아 리가 내 골짜기에도 울리다 지치.. poem/時雨의 시읽기 2009.06.27
뒷짐- 이정록 뒷짐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위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임을 이제야 알랐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 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개딜 곳 없던 등.. poem/時雨의 시읽기 2009.06.26
물의 결가부좌-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덕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 poem/時雨의 시읽기 2008.07.07
누에- 송재학 누에 송재학 아마 내 전생은 축생이었으리 누군가 내 감정을 건드린다면 하루아침에 나는 누에로 되돌아가버릴지 모른다 출퇴근길에 만나는 강변의 야산이 친애하는 벌레처럼 다가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잠들면 나는 늘상 몸을 뒤척이며 어디론가 가고있었다 게다가 고기를 멀리하고 나무 그늘의 통.. poem/時雨의 시읽기 2007.11.27
손목- 윤제림 손목 윤제림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 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에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poem/時雨의 시읽기 2007.11.19
나 한때 - 김지하 나 한때 김 지 하 나 한때 잎새였다 지금도 가끔은 잎새 해 스치는 세포마다 말들 태어나 온 우주가 노래 노래부르고 잎새는 새들 속에 또 물방울 속에 가없는 시간의 무늬 그리며 나 태어난다고 끊임없이 노래부르고 노래부른다. 지금도 신실하고 웅숭스런 무궁한 나의 삶 내 귓속에 내 핏줄 속에 울리.. poem/時雨의 시읽기 2007.11.05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날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poem/時雨의 시읽기 2007.11.01
조롱박- 울음 유종인 조롱박 - 울음 유종인 새끼 조롱박에 귀를 댄다 푸루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갈수록,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먹울먹하게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조롱박은 제 몸을 자꾸 밖으로 넓혀갔다 안에서 나는 소리를 밖에서 듣지 못하도록 조롱박은 허리를 졸라가며 몸을 밖으로 밀어냈다, 그 새끼 조롱박 어.. poem/時雨의 시읽기 2007.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