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목둘레- 안도현 매화꽃 꽃둘레 안도현 수백 년 전 나는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마을에 나타난 나 어린 계집 하나를 지극히 사랑했네 나는 계집을 분 盆에 다 심어 방 안에 들였네 하루는 눈발을 보여주려고 문을 열었더니 계집은 제 발로 마루 끝으로 걸어나갔네 눈발은 혀로 계집의 목을 빨고 핥 았네 계..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9
안개- 기형도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 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5
첫눈- 유종인 첫눈 유종인 어제는 슈퍼에서 말걸리 한 병 사다 마시고 홀로 잠잠히 취해 잠들었다 초저녁잠은 내처 꿈이 없었다 아니 꿈이 있었다면 꿈에 밀려 사라졌다 땅이 다른 나라에 사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동안 기르다 죽은 고양이와 개들도 모두 물너울 저편의 섬처럼 잠겼다 이상하다 참..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5
제비- 이윤학 제비 이윤학 제비가 떠난 다음 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 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상처를 생각하겠지 전깃줄에 떼 지어 앉아 다수..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3
어떤 문신- 유종인 어떤 문신 유종인 비가 내렸다 지하철 입구 한구석에 처마도 없이 비를 긋는 사내가 있다 옆구리 모로 누운 채 온몸에 비를 심는 사내가 있다 제 후줄근해진 몸에 비만 심었으랴 능갈맞은 창녀처럼 치큰대며 오는 비의 손목을 끌고 변변한 묵정밭 한 뙈기 없는 시골 내려가면 그대로 반가..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23
사랑을 놓치다 _청산옥에서 5 -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 청산옥에서 5 ......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8
뿔- 유종인 뿔 유종인 추운 날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뿔도장을 새기는 사내 가 있다 뜨내기손님의 이름을 플라스틱 뿔도장에 새겨넣는 소리, 그 소리가 왁자지껄 시장판 소리들 중에 제일 어린 소리겠다 생피가 돌던 뿔이 돌덩이처럼 굳어 이름 하나를 거기 심을 때까지 새로운 뿔이 산 허공에 돋아,..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8
찬란- 이병률 찬란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7
아호-유종인 아호 유종인 길바닥에 흙먼지 뒤집어 쓴 채 두부 한 판 버려져있다 콩물 속에 엉기듯 굳어가던 이름은 새벽에 도드라져 나온 몸이다 몸이 그대로 이름을 받은 두부 한 판 누군가 아귀아귀 씹어먹을 부드럽고 고소한 이름 한 모! 초당이여 유명을 달리한다는 게 별 것 아니구나 다시 못 부.. poem/時雨의 시읽기 2016.02.16
잘 익은 사과 김혜순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 poem/時雨의 시읽기 20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