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 poem/時雨의 시읽기 2011.10.09
등대- 이홍섭 등대 이홍섭 나 후회하며 당신을 떠나네 후회도 사랑의 일부 후회도 사랑의 만장 같은 것 지친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불빛을 잘못 보고 낯선 항구에 들어선 배였다고 생각해주시게 이제 떠나면 다시는 후회가 없을 터 등 뒤에서, 등 앞으로 당신의 불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먼 바다로 나아갈 터 후.. poem/時雨의 시읽기 2011.08.15
이문재- 소금 창고 소금 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 poem/時雨의 시읽기 2011.06.23
獨酌 독작- 류근 독작 류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질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poem/時雨의 시읽기 2010.04.24
윤제림- 사랑을 놓치다 詩 나는 결국, 죽을 때까지 실업이 못 된다 열부 춘향이 처럼, 남산 소낭구처럼, 물론, 묶여서도 같혀서도 한양성 오가던 춘향이만이야 못하겠지만, 눈 박힌 쪽말고는 고개 한번 돌려본 일 없는 저 소낭구만이야 못하겠지만, 그만 두겠노라고 흰소리하다가는, 눈 뜨면 또 이렇게 일 나오느니! 평생직장,.. poem/時雨의 시읽기 2010.04.15
폭포- 김수영 폭포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 poem/時雨의 시읽기 2010.04.06
딸기- 김혜순 딸기 김혜순 접시에 붉은 혀들이 가득 담겨 왔다 찬송 부르는 성가대원 입속의 혀처럼 가늘게 떨고 있었다 네 혀가 내 혀 위에 얹혀졌다 두 개의 혀에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세상의 온갖 맛을 음미하다 이제 돌아와 우리는 좁쌀 같은 돌기들을 다소곳이 맞대었다 너는 입속에 혀만 있고 이빨이 없는 .. poem/時雨의 시읽기 2010.04.03
김종삼- 북치는 소년 북치는 소년 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서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오늘 눈이 옵니다. 삼월의 눈, 진눈깨비처럼도 내리다가 함박눈처럼도 내립니다. 내용없는 아름다움이라니요, 그도 한 장 카드 같은 풍경.. poem/時雨의 시읽기 2010.03.09
가슴에는 환한 고동 외에는 가슴에는 환한 고동 외에는 박형준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커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 가는데 .. poem/時雨의 시읽기 2010.03.03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시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나는 이 시대의 사랑을의 시인 최승자가 11년이란 긴 세월을 건너와 한편의 시집을 세상에 던졌다. 몇번 마구 골라서 옮기자면 쓸쓸해서 머나먼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상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 poem/時雨의 시읽기 201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