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shiwoo jang 2011. 10. 9. 16:57

인중을 긁적이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고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연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

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

라는

사실을 ,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 5일, 6일, 9일 ......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이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

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이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

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 자꾸 인중을 더듬어 보게하는 시!

 내가 잊어버렸을 울음과 탄식을 생각하게 하는 시!

그리고 나의 삶과 사랑과 죽음 따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시!

그는 참 시를 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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