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유종인
어제는 슈퍼에서 말걸리 한 병 사다 마시고
홀로 잠잠히 취해 잠들었다
초저녁잠은 내처 꿈이 없었다
아니 꿈이 있었다면 꿈에 밀려 사라졌다
땅이 다른 나라에 사시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동안 기르다 죽은 고양이와 개들도
모두 물너울 저편의 섬처럼 잠겼다
이상하다
참 이상도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 세상이 받아쓰기 백 점을 맞는
날이 있다
그저 받아만 놓고 백지로 크게 웃는 날이 있다
하늘 저편 나라에서도 누가
홀로 술 한 동이 비우고
머리가 하얗게 세는 꿈을 꾸었는가 이하 李賀여
쓰지 말자, 오로지 쓰지 말자
백지에 대한 태만이, 이곳을 비운 사람들에 대한 공복
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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