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뿔- 유종인

shiwoo jang 2016. 2. 18. 11:18


                           유종인



추운 날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뿔도장을 새기는 사내

가 있다

뜨내기손님의 이름을

플라스틱 뿔도장에 새겨넣는 소리,

그 소리가 왁자지껄 시장판 소리들 중에

제일 어린 소리겠다


생피가 돌던 뿔이 돌덩이처럼 굳어

이름 하나를 거기 심을 때까지

새로운 뿔이

산 허공에 돋아, 속울음 같은 피로 보름달을 치받던 때

도 있으리라


자라지 않는 이름을 키우다 숨진

쓸모를 놓친 도장들 서랍째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자식들

남겨진 아비의 쓸모만을 갖고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여전히 뿔 속에서 피가 도는 이름의 아비들,

석양을 바라고 산비탈에 있던 산양처럼

그 산양이 내려놓은 뿔 가지 하나처럼

몸은 없고 이름만 붉은 입술로 남아

누군가의 간절한 기억에 입맞추고 싶은 망자들,


추운 날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뿔도장을 새기는

사내가 있다

살아서 짧게 새기고 죽어서 오래 버티리라

옛집의 낡은 서랍 속에서 남겨지 옥구슬처럼

제 이름의 뿔도장이 구르는 소리, 그 작은 기척에

저승 귀를 토끼처럼 세우고 소리의 배를 채우러 오는

망자들 있으리라



 -남겨진 아비의 쓸모만을 갖고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여전히 뿔 속에서 피가 도는 이름의 아비들....

  이 대목에서 깊은 한 숨이.....


'poem > 時雨의 시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문신- 유종인  (0) 2016.02.23
사랑을 놓치다 _청산옥에서 5 - 윤제림  (0) 2016.02.18
찬란- 이병률  (0) 2016.02.17
아호-유종인  (0) 2016.02.16
잘 익은 사과 김혜순  (0) 20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