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우륵- 고영민

shiwoo jang 2016. 3. 8. 17:46

우륵



                      고영민


1

 가얏고라고 했다 사내는 그 악기를 강물에 버린 지 이

미 오래다 푸른 공명반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열두 줄,

칼로 그 줄을 차례로 끊고 통째로 강물에 던져버렸다 줄

마다 기러기발을 받쳐놓은 흐린 강물이 거듭 소리의 새

옷을 입고 태어난다 마주한 한 곡조가 긴 꼬리지느러미

를 달고 물살을 거슬러올라 얼룩진 사내의 눈자위를 파

고든다


 저녁이 오고 있는가, 사내가 운다

 불 지르고 싶은, 아니 문지르고 싶은 물살 하나를 데불

고 와 사내는 저혼자서 운다 그때마다 강물은 제 발밑에

두터운 소리의 그늘을 부리고 팽팽하게 당겨놓은 현 하

나하나를 튕긴다 첨벙, 첨벙, 수면 위로 잘못 짚은 소리

들이 물고기처럼 튀어올랐다가 사라진다


2

멀리가는 물, 멀리 가는 소리

12현금, 12곡

강물은 다시 길을 이어 가던 길을 멀리 돌아가고 잇다

햇빛이 물 위에서 소리없이 끊고 사내는 오늘도 강물을

조심스레 흔들어보다가 뒤돌아 간다


3

가끔 언덕 위로 검은 염소를 끌어다 묶어놓고 사내는

한나절 강물만 내려다보았다 초조하게 우는 소리가 염소

의 울음인지 사내의 울음인지 강물은 끝내 알지 못했다

어느날 사내는 언덕에 앉아 천천히 자신의 몸을 부질없

이 튕겨보았다 얼굴을 만지다가 얼굴을 튕겨보고, 얼굴

속, 눈과 코와 입을 주섬주섬 튕겨보았다. 그리고 입모양

을 동그랗게 말아 아, 하고 소리를 내어보았다 그러자 눈

물이 나왔다


 사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이 울음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러자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

다 소리를 따라 온몸이 함께 울고, 서럽고 서러운 생각들

이 울림통이 되어 몸을 진동 시켰다 울음 속으로 죽은 아

버지와 어머니가 다녀가고, 살던 초가집이 들고, 앵두꽃

이 피고, 들것에 실려나간 누이들이 왔다갔다


4

  사내는 가만히 젖은 손을 들어 하늘에 새를 그려보았

다 그러자 새 한마리가 하늘에 돋아 지저귀었다 다시 검

은 구름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사내는 자신이 손수 끊어버린 열두 줄 가얏

고를 조심스레 강물 위에 그렸다 그러자 가얐고 한 채가

물 위로 떠올랐다 사내는 천천히 가얏고 속으로 들어갔

다 소리의 수족들이 사내의 몸을 붙잡았다 강물은 이미

산의 처마그늘에 들어 가라앉고, 강물이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적시고, 젖가슴을 적시고, 턱을 천천히 적셔도 사

내는 계속 가얏고 속으로 들어갔다


5

 강물은 사내가 버린 악기를 반듯하게 받쳐들고 있다

오늘 사내는 다시 또, 어느 국으로 쓸쓸히 망명을 가

고 있는가, 망한 나라의 음악으로 가파른 벼랑 끝에 앉아

사내는 슬픈 탄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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