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등 아래 벚꽃- 황지우 수은등 아래 벚꽃 황지우 사직공원 비탈길, 벚꽃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때 그 아래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12
흰밤- 백석 흰밤 백석 옛 성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어쩐지 뒷이야기가 무성하게 많을 것 같은 이 한편의 시에는 한권 분량의 소설일 수도 있을 것 같은, 한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도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11
탁족- 황동규 탁족 황동규 휴대론 안 터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살갑다 아주 적적한 곳 늦겨울 텅 빈 강원도 골짜기도 좋지만, 알맞게 사람 냄새 풍겨 조금 덜 슴슴한 부석사 뒤편 오전약수 골짜기 벌써 초여름, 산들이 날이면 날마다 더 푸른 옷 갈아 입을 때 흔들어도 안터지는 휴대폰 주머니에 쑤셔 넣고 걷다 보..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10
선운사- 박세현 선운사 박세현 동백꽃 보겠다고 떠난 길 인간적으로 굽어지던 호남고속도로 위에 때마침 분분하던 벚꽃 이파리들 마음 몇조각 흩날리며 선운사에 당도하니 일찍 핀 꽃들은 수삼 일 전에 져버렸고 방금 망울 맺힌 것들은 되레 나를 보겠노라 동동거린다 멀거니 동백꽃 떨어진 자리를 쳐다보고 섰자니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9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9
빈집- 기형도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9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곧 세상 모든 꽃들이 제 몸의 은밀한 구석..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8
아직은 바깥에 있다- 황지우 아직은 바깥에 있다 황지우 논에 물 넣은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빛이 사선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입체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 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 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를 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 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 poem/時雨의 시읽기 200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