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를 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 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
비를 다시 생각하게 한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성복의 시집 『아, 입 없는 것들을 읽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시 몇 편중의 한편인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읽으면 시인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미치는 것일까? 혹은 어디까지 미쳐야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비에 대한 시는 많다. 비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와 느낌들은 시인의 감수성을 자극하여 시인들이 비에 관한, 비를 모티프로 한 많은 시를 쓰게 했다. 이성복의 시에서의 비는 지금까지 내가 읽은 비에 대한 시, 혹은 내가 가진 비에 대한 이미지, 비에 대한 내 생각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는 시로 느끼게 한다.
단단하지 못한 송곳이 그러하고 그 송곳이 땅을 쪼으려 내려온다는 것이 그러하고, 그리고 행패를 부리다 아예 길바닥에 드러누워버리는 자해공갈단이라니, 비의 이미지를 이처럼 강경하고 폭력적으로 묘사한 시가 또 있을까? 그리고 비는 다시 윤활유를 들이 부은 듯 아스팔트를 윤기나게 하고 무명 통치마였다가 다시 여러 다발의 탯줄이 된다. 기막힌 상상력의 변주다. 비는 무생물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다 폐경도 끝났을 늙은 하늘의 생리혈이 되어 질퍽하게 쏟아진다. 아니 누군가 우주의 알집을 건드려 터진거라고 한다. 그리고 제 스스로 무너져 쏟아져 내린 알집의 두터운 벽이라고 한다.
이성복의 시에서 비는 무생물이었다가 다시 생명을 얻는다. ( 송곳-자해공갈단 -윤활유-무명통치마-탯줄-생리혈-터진 알집),그것도 우주의 알집이라는, 모든 생물의 기원은 물이라고 들었다. 생물의 기원으로 서의 물, 즉 비는 우주의 알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닐까 한다. 비가 온다는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생명성을 찾고 생물의 기원까지 확대시킨 시인의 상상력과 시행을 끌고 오는 한결같은 힘이 돋보인다. 그리고 산문시 형태의 시임에도 리듬이 느껴지고 매끄럽다 세련미가 느껴진다. 이질적인 사물들이 비를 묘사하는 한 점으로 모인다는 것이 신기하기만하다.
시는 변주의 폭이 클수록, 낯설음이 강할수록 독자에게 어필하는 힘이 커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변주의 폭이 억지가 아니고 그 낯설음이 낯섦을 위한 낯설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원의미보다 확대되고 울림이 커질 때 한해서이다. 이 시는 그런 변주의 폭과 낯설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독자가 낯설음에서 받는 충격과 공감이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내가 뽑은 좋은 시의 목록에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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