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사평역에서- 곽재구

shiwoo jang 2006. 3. 1. 19:48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한편의 시가 주는 감동이나 울림이 클 때 그 시는 또 다른 감동을 남긴다. 이 시의 존재를 임철우의 단편소설에서 처음 알았다. 임철우의 소설을 먼저 읽고 시를 찾아 본 경우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가 먼저다. 시를 모티프로 소설을 쓴 경우라고 한다.
사평역에서는 우선 잘 읽힌다. 시를 읽으면 머리 속으로 한편의 영상이 그려진다.막차를 기다리는 시골 간이역의 늦은 시간 서로의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향한 남루한 단풍잎 같은 사람들 몇이 톱밥난로를 에워싸고 창밖에는 송이 눈이 내린다.
톱밥난로에서는 톱밥이 불꽃을 만들어 내며 탁탁 타오르고 사람들은 창백하고 거친 손을 톱밥난로에 온기를 구한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른 갈래로 펼쳐지고 몸과는 달리 마음들은 한곳에 모이지 못하고 흩어진다. 누군가 쿨럭이며 기침을 하고 사람들은 잠시 저마다의 생각에서 깨어나 기침을 한 누군가에 눈길을 모은다.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아직 기다리는 기차는 오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기차를 기다리는 막연한 그러나 오고야 마는 것들에 대한 기다림이 아닐까?
이 시는 머리를 치기 보다는 가슴을 울린다.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가 끝내 목울대 얼얼하게 만든다. 독자가 그 시간, 그 공간에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시의 울림은 참 오래 남는다. 그 긴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일까? 시의 리듬감과 아름다운 묘사, 적절한 시어의 자리 찾음이 아닐까? 시는 유일정적의 언어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 몇몇 시어는 그 자리에서 있음으로 하여 더욱 빛 발하는 시어들이 많다. 그 점에서 이 시는 큰 성공을 거둔 시라고 할 수 있다. ‘ 그믐처럼 몇은 졸고, 청색 손바닥을 불빛에 적셔두고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이처럼 이 시는 빼어난 묘사를 찾을 수 있다.
이 시는 곽재구의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시인의 데뷔작이다. 곽재구는 이 시를 넘어서는 시를 쓰지 못했다. 사평역에서가 주는 그 울림을 넘어서는 시를 재연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을까? 사람들의 입에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좋은 시 한편을 얻기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가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울림과 함께 선명한 이미지를 오래도록 남기는 이유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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