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편지
박세현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기다림의 사립문을 밀고 싶습니다
겨울밤 늦은 식사를 들고 있을 당신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해묵은 안부 사이에
때처럼 곱게 낀 감정의 성에를
당신의 잔기침 곁에 앉아 녹이고 싶습니다
부당하게 잊혀졌던 세월에 관해
그 세월의 안타까운 두께에 관해
당신의 속상한 침묵에 관해
이제 무엇이든 너그러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의 바람벽에 등불을 걸고 싶습니다
겨울이면 떠올려지는 이 시는 저의 은사님의 시입니다. 선생님의 시를 잘 많이 대한 저로서는 다소 의외다 할 정도로 말랑말랑한 시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처음에 길에서 만난 가벼운 안부처럼 이 시를 스치고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해를 바꿔서 다시 이 시를 만났을 때 선생님과 이 시를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했더랬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다시 이 시와 만났을 때. 어? 선생님 시네...
참 아둔하고 무심한 제자였구나 싶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더랬습니다. 가벼운 안부같은 이 시를 안부 대신 올립니다.
이 시 혼자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 마음의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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