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사진관이 있는 동네

학림 다방, 그 오래된 풍경

shiwoo jang 2005. 10. 28. 11:56

이번 가을에는 금요일이면 비가 내리네요.

금요일이면 혹시나하고 하늘을  한번 더 쳐다보게 되는데 오늘도 여지 없이 비가 내리네요.

이 비 그치면 초겨울 날씨처럼 추워질 거라고요. 물든 나뭇잎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다 떨어져버리면 섭섭하기도하고 미안하기도 하겠네요.

오늘 처럼 서늘하고 마음 찬 날이면 따스한 커피 한잔이 생각 나지요.

그것도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말이지요. 그 오랜 기억을 떠올리기 좋은 곳이 떠올랐습니다


기억하실런지요? 대학로의 학림다방입니다. 지금쯤 대학로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었겠지요.

바람이라도 조금 불라치면 우수수... 마음까지 녹아 내리는 그 풍경을 창밖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제 마음을  학림으로 보냈습니다.

오래되어 반질하게 닳은 나무계단을  가능하면 소리 나지않게,

아니면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걸어 올라가  잠시 숨을 고르고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리문 너머 풍경에 슬쩍 눈길을 보내고

문을 삐걱 소리나게 열고 들어갑니다. 오늘은 브람스가 좋겠군요.

문을 여는 순간 브람스의 현악 6중주 2악장이 흐른다면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막 갈아 내린 진한 커피향이 코끝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건 반사처럼 입안에 침이 고이고 그 향에 매료되어 저도 모르게 구석자리거나 

운 좋으면 창가 자리에 가서 앉겠지요.  그때부터 제눈은 바빠지기 시작할겁니다.



오래되어 반질한 탁자며 뮤직박스에 꽃힌 LP판, 그리고 근사하고 풍부한 음악을 들려주던 스피커로, 무뚝뚝함이 뚝 떨어지는 베토벤 데스마스크 위로, 제 눈은 바삐 움직일 겁니다.

저 이가 누구였더라.  눈 익은 연주가 사진액자 위로, 낡음해진 칸막이 사이로, 다락방 같은 구석자리로...



어딘가에 오래되어 나달거리는 방명록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알던 혹은 알지 못하던  많은 이야기들이 어느 구석에선가 납작 엎드려 숨쉬고 있다가 

밤사이 저희끼리 말문을 툭! 터트리고 깔깔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 과묵한 베토벤 선생께선 그런 저런 이야기를 다 알고 있지만 못본척 못들은 척

여전히 묵언수행 중일테고...



잠시 창밖에 눈길을 보낼 수도 있겠지요?

 



창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다른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아니라고요? 자 보세요! 보여주는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 걸요.



자, 이제 자리에 앉아 주문한 커피를 음미하면서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좋은 시간입니다.

운이 좋다면 지금 읽는 책의 저자를 건너편 자리에서 볼 수도 있답니다. 

반가운 마음에 아는척 할 수도, 조금 머뭇거리며 서명을 청해도 좋겠지요 

학림을 찾는 작가들이  아직 더러 있으니까요.



그도저도 싫다면 글을 직접 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혹 이곳에서 숨쉬는 이야기들이 당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머리 속을 들어왔다 나가면서 뭔가 이야기를 남길지도 모르니까요.



아쉽게도 학림을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저 나선형 계단을 밝아 나가면  다시 익숙한 거리와 만나게 됩니다. 가끔 시간여행을 하듯 학림을 찾으면 오래된 기억들이 불쑥 불쑥 찾아올지모르겠네요. 제가 그랬듯이 말이지요.

하나 둘 사라져가는 오래된 장소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찾을 길 없지만

학림만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주기를,

그리하여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숨쉴 수 있기를 ...

오래되어도 잊히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풍경도 있음을 알게 된다면 행복할텐데요.

어느 바람부는 날 대학로에 가신다면 학림의 나무계단을 밟아 오래된 풍경속으로

시간여행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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