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안주철

shiwoo jang 2020. 3. 28. 12:57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안주철

 

 

희미하게 남아 있다.

희박하게 남아 있다.

 

생활 속에 맺힌 물방울이

빛 한방울을 소중하게 간직하듯이

사랑이라는 말 속에 사랑이 맺히듯이

이별이라는 말 속에 이별이 스며들지 않듯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희박하게 나의 일부가 남아 있다.

 

내 속에는 가끔 내가 가득한 느낌이 들고

내 속에는 거의 나 이외의 것이 가득하지만

나와는 멀다. 멀리에 영영 있다.

 

사랑도 하기 전에

이별도 하기 전에

헤어진 사람과 같이 나는 희미하게

희박하게 숨을 쉰다.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내가 없다.

사진을 찍어도 내가 없다.

목에 힘을 주고 뒤를 돌아보아도

내가 없다.

 

사랑할 준비를 마친 후에도

이별하지 않았는데 이미 헤어진 사람과 같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희박하지만

명료한 내가

생활 속에 한방울 맺혀 있다.

 

 

-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창비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찾아도 없다.

그저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