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단기 기둥 곁에서
서대경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
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
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
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
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
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
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
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아릴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백치는 대지를 느낀다, 문학동네
그 옛날 내가 살았던 우리 집이 있는 동네를 서성이면
한 마리 염소가 된 기분일 것 같은데...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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