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thing good/책상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우리말 열가지

shiwoo jang 2006. 12. 20. 13:03

 

                                    길

길은 나를 매료시키는 말이다. 길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내 눈앞에는 길게 펼쳐진 길이 그려진다. 그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첫 발을 내 딛는 순간부터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를 예감할 수 없어야한다. 길은 떠남을 전제로 한다. 나는 배낭을 메고 휘적휘적 떠나는 나를 상상한다 .나는 걷는다  발끝에 물집이 잡히도록 걷다가  발이 아파 걷지 못할 때 길가의 어느 마을 어귀의 큰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게 하고 발에 잡힌 물집을 터트리면 그 물집 또한 내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길은 나를 가두지 않는다.  길 안에서도 길 밖에서도 나는 자유롭다. 길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나는 자유로워진다.


                                   강

강은 울림이 큰말이다. 강은 입안에서 한참을 머물고서야 바깥으로 나간다. 강은 멈춤이 아니라 살아 꿈틀거리는 흐름이다. 맑은 듯하면서도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슬쩍 치맛자락보이며 달아나는 처녀 같다. 은근한 도발, 그래서 강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수성을 건드리는 것은 아닐까?  나는 강에서 많은 이미지를 얻는다. 찰랑찰랑 맑은 물소리, 가장자리에서 흔들리는 갈대, 수면에 닿아 물살을 가로질러 강을 건너는 햇살, 유유히 유영하는 크고 작은 생명들 강안에서 살아 흐르는 미묘한 흔들림들... 강은 투명한 흔들림이다. 깊은 울림이다.


                         비


자해 공갈단이다. 사선으로 드러눕는다. 수직으로 낙하한다... 비는 새로운  많은 말들을 만들어낸다 특히  시 구절들을... 비는 오감을 자극한다. 어린시절 들었던 양철지붕 위에 비방울 떨어지는 소리, 똑 또옥 똑... 쏴아... 두 두둑.... 비, 비이, 짧게 끊어서, 길게 늘여서 말할 때 느낌이 다르다.  안개비, 는개비, 실비, 이슬비, 보슬비, 가랑비, 소낙비, 여우비, 꽃비....내리는 이름에 따라 느낌도 달라진다. 촉촉하다 ,축축하다, 시원하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날이면 노릇노릇 잘 구운 부침개 생각이 나는 것은 생체리듬과 관계있다고 했던가?  비 오는 날은 커피 한 잔과 빌리 홀리데이 축축하고 끈적한 음색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기억의 저장고 깊숙이 들어가 추억여행 하기 좋은 날이 아닐까.


                      숲


숲이라는 말을 내보내려면 휘파람을 불 듯 입술을 동그랗게 내밀어야한다.   숲이라고 말하는 순간 푸른 바람 한줄기 따라 나온다.  그 순간 푸른 바람은 내 주위를 잠시 침묵하게 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바람의 한가운데 서있게 된다. 그 바람의 끝자락에 묻어나오는 시원한 그늘. 그 아래 서 걷는 상상 만으로 얼마나 싱그럽고 기분 좋은 일인가. 숲은 나무와 그늘과 바람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계절마다 몸빛을 바꾸는 숲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색이 풍요로워진다. 내 안에도 나도 모르는 또 다른 숲이 있지 않을까?


                        산


산이라는 말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 같다. 숲이 작은 집 한 채의 이야기라면 산은 마을 하나 정도의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있다. 산이 없으면 낮은 구릉이라도 끼고 있다.  유년시절의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의 산을 보다가 강원도로 옮겨와 만난 산은 깊고 높다. 아흔 아홉골을 가진 산이라면 아흔 아홉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 것 같다. 혼자 타박타박 걷다보면 산짐승 하나 만나 희롱하던지 내빼던지...옛날옛적 이야기 한 자락에도 산은 숨어있었다.  머리 복잡한데 운동화 갈아 신고 산에나 오를까?  산! 이 말이 좋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어린 시절 들었던 옛날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잎


잎! 이 말을 단정하다. 잎이라고 말하는 순간 입이 다물어진다. 입 벌리고 잎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잎들을 다 모은다면 얼마나 될까? 생각만으로 기분 좋아진다.  잎은 생김새도 다양하다. 길쭉하거나 동그랗거나 뾰족하거나  아기손 닮은 잎도 있지 아마? 비 오는 날 토란잎에 또르르 굴러다니는 빗방울, 토란잎은 잎이 넓어서 비 오는 날 우산대용으로 좋다지 아마? 그리고 바람 부는 날 은사시나무가 흔들리는 모양을 본다면 같이 손을 흔들어 주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다.  잎새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순정한 시인이 있었지 아마?  조용히 입 다물고 싶을 때 나는 잎이라고 말한다.


                          꽃


꽃은 식물의 성기라고 한다. 꽃잎을 열어 보면 알게 된다. 수술과 암술 그리고 꽃가루 꽃잎의 생김새 잘 살펴본다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지 부분이다.  아니라고? 꽃잎의 부드러움은 입술과도 같고 여자의 은밀한 부분과 닮아있다. 조지아 오키프의 꽃그림을 본다면 수긍하지 않을까? 꽃이라는 말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풍경을 그려낼 수 있지만 수수하고 숨은 듯 없는 듯 피는 꽃을 발견했을 때 그 삭막한 풍경에 생기를 불어 넣는 마법 같은 존재다. 꽃을 처음 꽃이라 부른 이는 누굴까? 누가 이름을 불러준 것도 아닌데 저 혼자 나는 꽃이라고 잘난 척 했을까?


                       결

결이라는 말은 혼자서도 충분히 울림을 가지는 말이지만  혼자 있을 때보다 다른 말과 어우러질 때 더 빛을 발한다. 숨결, 마음결, 꿈결, 나무결, 물결, 얼떨결.... 결은 함께 쓰이는 말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 같이 너그럽다. 형태를 가졌다가 어느 결에 모습을 감춰 버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고루 가지는 숨결은 또 얼마나 귀한 것인가. 잠든 아가의 고른 숨결은 세상을 얼마나 평화롭게 하는지.. 속으로 흠모하던 사람에게 얼떨결에 입맞춤을 당한 아가씨의 숨결을 어떨까?


                      꿈


이 한마디 말이 얼마나 많은 상상과 생각을 불러왔는지. 이 말은 두 가지 쓰임새가 있다. 하나는 잠들어야 얻을 수 있는 꿈, 다른 하나는 잠들지 않아야 얻을 수 있는 꿈.  이 두 가지 쓰임은 모두 상상력을 전제로 한다. 잠들어서 만나는 꿈은 분명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꿈속에서는 가능하다. 이루고 싶은 꿈 또한 마찬가지. 상상력이 없다면 그려 볼 수 없고 그려 볼 수 없다면 사람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그처럼 열심히 전력 질주할까? 두 꿈의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저 얻어지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고 노력해야 얻어지는 꿈이다. 어떤 꿈이 더 좋으냐고?  나는 둘 다!

                 문


무엇이 있을까 저 문을 열면? 낯선 문을 만날 때 두렵고 설레지만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린다. 문의 안과 밖의 풍경은 어떻게 다를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문이어야 한다. 문은 이면의 풍경을 볼 수 없으므로 문을 열고나서면 다른 세상이 기다릴 것 같은 성급한 마음에 문을 열고 나간다.  문 밖 미지의 풍경, 그 알 수 없음이 나를 흥분시킨다. 새로운 길을 만나고 낯선 강을 건너고 울창한 숲에서 비를 피하고 산을 넘고 잎이 만들어낸 나무 그늘 아래서 활짝 핀 꽃을 들여다보면 어느 결에 나비가 날아든다.  이것이 꿈인지 꿈속의 나비인지 나비가 꾼 꿈속의 나인지...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 곳은 처음 길을 떠나려고 열었던 문! 이것도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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