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길에서 만난 사람들

[장시우의 예술家 산책] 1. 그림책 시인 이상희

shiwoo jang 2022. 3. 1. 09:57

“어린시절 읽던 그림책, 일상의 정신적인 보물로 작동”
등단 시인→방송작가
그림책 사랑은 운명
3000권 번역·50여권 창작
2003년 원주 정착
패랭이 그림책 버스 운영
원주=그림책도시 밑거름
원주시그림책센터일상예술
수집 그림책·자료 관람 가능
“세상에 대한 긍정 고난 이겨내는 해피엔딩 그림책이 주는 진정성”

▲ 그림책으로 가득 찬 원주복합문화예술센터 내 원주시그림책센터 일상예술에서 책을 읽고 있는 이상희 시인.

■ 시인에서 그림책 사람으로 


언제부터인가 그림책 도시라고 하면 원주를 떠올리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누군가 원주와 그림책을 이어주지 않았다면,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면 원주가 그림책 도시로 각인될 수 있었을까? 원주에 그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 이상희 시인이다. 이상희 시인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림책을 말하고 그림책을 읽어주기를 좋아하는데 그의 초대는 묘한 끌림이 있어 다음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그림책 세상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이상희 시인을 그림책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그는 그림책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로 등단하면서 시를 쓰던 그가 그림책과 사랑에 빠진 건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였다. 방송작가로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좋은 전시가 있으면 점심을 거르고 그림을 보러 다닐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던 그가 시적인 글과 그림이 다 있는 그림책에 매료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운명처럼 그림책과 사랑에 빠진 그가 그동안 번역한 그림책이 3000여 권에 이르고 창작한 그림책만 50여 권을 넘었다.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 화가로 활동 중인 부군 원재길 작가와 함께 2001년 서울 생활을 접고 원주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책 활동을 전개했다. 2003년부터 도서관에서 그림책 교실을, 2004년부터 패랭이 그림책 버스를 운영하며 다양한 그림책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에게 상상과 꿈의 세계를 선물했다. 2013년에는 사회적협동조합 그림책도시를 만들어 그림책이 가진 순정한 즐거움과 예술성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그림책 전문가를 교육하고 양성하면서 그림책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이상희 시인은 작년 8월부터 원주시그림책센터일상예술 센터장으로 옛 원주여고에 있는 원주복합문화예술센터 내, 그림책센터 일상예술에서 아이들과 그림책이 궁금한 어른들,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예비 작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요즘은 2월 8일부터 IBBY(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국제전시행사를 센터에서 진행하게 되어 준비에 분주한데 이 행사는 2년마다 회원국 80개국에서 대표 도서 3권씩 제출하여 전 세계를 순회 전시하는 행사로 여러모로 의미도 있고 센터를 홍보할 좋은 기회라 센터 직원들 모두 밤을 낮처럼 일하고 있다며 행사 자료를 보여주며 행사를 소개했다. 잦은 야근으로 피곤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다.

■ 순정한 진정성, 무해한 즐거움

그가 이처럼 밤낮없이 열정을 쏟는 그림책은 어떤 매력이 있을까? “그림책은 작가가 예술성을 쏟아붓는 창작자의 산물이고 작가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선물하려고 그림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른이 만들고 아이가 보는 거죠. 육아 과정에서 그림책을 발견하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감 얻게 되죠. 예술 향유를 아이들과 함께 해소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림책에서 발견하는 행복감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자연발생적으로 공유하게 돼요.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이라는 책에서 보면 화재로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사들이는 물건이 어린 시절 즐겨 읽던 책이에요. 이처럼 그림책은 정신적인 보물로 작동해요. 세상에 대한 긍정, 고난을 이겨낸 후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해피엔딩, 순정한 세계의 그리움 같은 무해한 즐거움, 나의 어린 시절의 증표 같은 것이 그림책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는 그림책이 글과 그림, 디자인이 빚어내는 아름다움과 순정한 진정성이 있고 좋은 그림책은 늘 그 기대를 충족시켜준다며 그런 순정한 진정성은 선한 영향력으로 많이 공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림책은 좋아하는 시, 그림이 다 있는 최고의 기재이면서 경쟁도 없고 비교우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 세계가 주는 기쁨, 그림책이 주는 신뢰감은 돈독해서 의심 없이 지금까지 일할 수 있었다며 그게 그림책에 빠져 일하는 이유라고 했다.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센터는 그의 일터이자 작업실이다. 직장인들을 위한 ‘야심한 그림책’ ‘그림책 워크숍’, ‘프리원데이 워크숍’과 이어지는 12강 프로그램, 등 올해도 다양한 그림책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센터 1층 그림책 아카이브에 그가 오랜 시간 모아 온 그림책과 자료들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가져다 두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는 그는 처음 그림책 버스가 생겨 너무 좋아 들떴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라며 몸은 힘들지만, 더없이 행복하다고 했다. 예술가에서 행정가로 일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부딪힐 때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림책에서 답을 얻기도 한다고 한다. 어떤 일에 부딪힐 때 그림책 주인공을 떠올리며 그 아이는 어떻게 했지? 이런 느낌일 때 어땠지? 어려움을 헤쳐가며 자기 길을 가는 어린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한다며 그림책은 직관적이고 솔직해서 천진하게 세상을 살게 한다고 말했다.

이상희 시인이 원주복합문화예술센터 내 원주시그림책센터 일상예술에서 그림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 10년 후에도 그림책 사람으로

그는 글과 그림을 혼자 쓴 그림책을 한 권은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욕망도 없어졌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그림책을 어떻게 쓸까를 고민했는데 이젠 누구에게 쓰게 할까를 고민하고 돕는 일이 더 좋아졌다며 예전엔 MBTI가 무조건 예술가였으나 요즘은 활동가로 나온다고 말했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성향도 바뀐 것 같다며 창작자로서의 감수성으로 작가들을 세심하고 예민하게 바쳐줄 수 있을 것 같아 조력자 역할을 자처하고자 한다는 그에게 10년 후의 모습을 물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10년 뒤에 원주 그림책 도시의 모습은 어떨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헤이온와이를 책마을로 회자하듯 원주가 그림책 도시로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요? 그림책 도시 히스토리와 과정이 널리 공유되면서 콘텐츠가 자산을 만들어 낼 것이고 후배들이 잘 이어나가 내가 할 일이 없게 되면 나는 그림책을 읽어주는 할머니로, 깨진 그림책 책등을 수선하거나 가구처럼 구석에 앉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림책 사람일 것 같다. 다행이다. 그런데 10년 후가 아니어도 그림책 읽어주는 그림책 시인의 차분하고 따뜻한 음성을 들으며 그림책 여행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으로 마음을 다치고 살아가는 일이 힘겨울 때 그림책센터로 가서 그가 숨겨둔 순정한 세계를 찾아 무해한 즐거움을 펼쳐보면 어떨까. 우연히 그를 마주쳐 그가 읽어주는 그림책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시인·문화기획자

● 장시우 시인·문화기획자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문화기획 전공 △‘예술가의 열두 발자국’, 시집 ‘이제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아’ 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