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부추 꽃을 보다 - 유종인

shiwoo jang 2016. 4. 20. 19:27

부추 꽃을 보다


                     유종인



환멸을 가장할 필요는 없다

생은 또 다른 곳을 풍경처럼 바라보고 있었지만

허공을 헤엄쳐오는 물고기는 아니었다 고요히

한낮이 흐르듯 타들어가는 오후에

나 홀로 집에 있다는 것이 작은 운명처럼 보였다

현관을 나서면 작은 마당이

온갖 잡초들과 나무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보여

준다

맨 마음으로 보면 언제나처럼 오줌이 마렵다

사철나무 울타리로 걸어가 아랫도리를 까면

푸른 혀를 가진 사철나무 잎사귀가 문득 푸른 눈구멍

으로 보인다

그 눈빛은 내 등 뒤에 피어난 몇 포기 부추 흰 꽃에 맞

춰진다

언제 따로 씨를 뿌린 것도 아닌데 매년 이맘때 쯤이면

가는 줄기에서 흰 꽃이 피어나고 그 꽃대 근처엔

환멸을 모르는 벌과 나비가 드물게 앉곤 한다

그 자리에 나는 가끔 발길이 멈춰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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