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
고영민
1
가얏고라고 했다 사내는 그 악기를 강물에 버린 지 이
미 오래다 푸른 공명반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열두 줄,
칼로 그 줄을 차례로 끊고 통째로 강물에 던져버렸다 줄
마다 기러기발을 받쳐놓은 흐린 강물이 거듭 소리의 새
옷을 입고 태어난다 마주한 한 곡조가 긴 꼬리지느러미
를 달고 물살을 거슬러올라 얼룩진 사내의 눈자위를 파
고든다
저녁이 오고 있는가, 사내가 운다
불 지르고 싶은, 아니 문지르고 싶은 물살 하나를 데불
고 와 사내는 저혼자서 운다 그때마다 강물은 제 발밑에
두터운 소리의 그늘을 부리고 팽팽하게 당겨놓은 현 하
나하나를 튕긴다 첨벙, 첨벙, 수면 위로 잘못 짚은 소리
들이 물고기처럼 튀어올랐다가 사라진다
2
멀리가는 물, 멀리 가는 소리
12현금, 12곡
강물은 다시 길을 이어 가던 길을 멀리 돌아가고 잇다
햇빛이 물 위에서 소리없이 끊고 사내는 오늘도 강물을
조심스레 흔들어보다가 뒤돌아 간다
3
가끔 언덕 위로 검은 염소를 끌어다 묶어놓고 사내는
한나절 강물만 내려다보았다 초조하게 우는 소리가 염소
의 울음인지 사내의 울음인지 강물은 끝내 알지 못했다
어느날 사내는 언덕에 앉아 천천히 자신의 몸을 부질없
이 튕겨보았다 얼굴을 만지다가 얼굴을 튕겨보고, 얼굴
속, 눈과 코와 입을 주섬주섬 튕겨보았다. 그리고 입모양
을 동그랗게 말아 아, 하고 소리를 내어보았다 그러자 눈
물이 나왔다
사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이 울음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러자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
다 소리를 따라 온몸이 함께 울고, 서럽고 서러운 생각들
이 울림통이 되어 몸을 진동 시켰다 울음 속으로 죽은 아
버지와 어머니가 다녀가고, 살던 초가집이 들고, 앵두꽃
이 피고, 들것에 실려나간 누이들이 왔다갔다
4
사내는 가만히 젖은 손을 들어 하늘에 새를 그려보았
다 그러자 새 한마리가 하늘에 돋아 지저귀었다 다시 검
은 구름을 그려보았다 그러자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사내는 자신이 손수 끊어버린 열두 줄 가얏
고를 조심스레 강물 위에 그렸다 그러자 가얐고 한 채가
물 위로 떠올랐다 사내는 천천히 가얏고 속으로 들어갔
다 소리의 수족들이 사내의 몸을 붙잡았다 강물은 이미
산의 처마그늘에 들어 가라앉고, 강물이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적시고, 젖가슴을 적시고, 턱을 천천히 적셔도 사
내는 계속 가얏고 속으로 들어갔다
5
강물은 사내가 버린 악기를 반듯하게 받쳐들고 있다
오늘 사내는 다시 또, 어느 국으로 쓸쓸히 망명을 가
고 있는가, 망한 나라의 음악으로 가파른 벼랑 끝에 앉아
사내는 슬픈 탄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