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時雨의 시읽기

물의 결가부좌- 이문재

shiwoo jang 2008. 7. 7. 22:51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덕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없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연근이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 잉어가 부레를 크게 하는 소리, 진흙이 뿌리를 받아들이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 보는 소리--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려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 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드렸던 하얀 마른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 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이문재. 물의 결가부좌 전문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이런 시 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그 시를 읽는 순간 좌절하게 되는 시가 있다. 그런 시를 만나면 숨이 턱 막혀버린다. 약이 오르기도 한다. 나는 왜 안 되는 걸까? 그 다음은 그 시를 요조조모 뜯어본다. 소리 내어 읽어본다. 그래도 흠잡을 곳이 없다. 슬그머니 질투가 나기 시작한다. 좋은 시를 만나면 내 반응은 대충 그렇다.

물의 결가부좌가 그러하여 처음 이 시를 보고 그런 일련의 반응과정을 거쳤다. 다시 보니 더 좋았다. 새벽, 어둠, 물소리가 찰랑찰랑 들릴 것 같은 충만한 물의 이미지하며 물소리, 바람소리, 벌레들 소리, 작고 여린 새벽의 소리들, 훅하고 코끝을 스며드는 물비린내, 막 제 잎을 여는 연꽃, 달콤한 연향……. 손에 만져질 듯 선명한 묘사와 시각과 청각과 촉각이 어우러진 공감각도 물처럼 저희끼리 유연하게 섞여있다. 그 고요하게 차오르는 설렘이, 그 유연한 동거가 깨어질까봐 시를 읽는 사람의 숨을 죽이게 한다.

만져질 듯 선명한 감각들은 오감을 고루 충족시키고 물수제비가 번지듯 퍼져나가는 여운과 울림이 시를 읊조리고 난 후에도 한동안 머릿속을 맴돈다. 아니 내가 그 새벽에 그 연못 언저리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조선조의 심성 맑고 여린 한 선비가 가만히 일러주는 이야기만 같아서 앉은 매무새를 고쳐 정색하고 앉아야 할 것 같은 느낌도 이 시를 읽으면서 얻게 되는 느낌이며 생각이다.

좋은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의 심상에서 뿐 아니라 외적 움직임까지 관할하는 것 같다. 이렇게 사람을 움직이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한다. 이런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번번이 좌절하게 된다. 가끔 내 머리 속의 시우물이 있어 한때 고이든 물이 점점 말라가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 들 때가 가장 비참해진다. 우물이든 펌프 물이든 마중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되새기며 이런 좋은 시를 마중물 삼아 조금씩 퍼 올리려 한다. 더 게을러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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