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
유종인
추운 날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뿔도장을 새기는 사내
가 있다
뜨내기손님의 이름을
플라스틱 뿔도장에 새겨넣는 소리,
그 소리가 왁자지껄 시장판 소리들 중에
제일 어린 소리겠다
생피가 돌던 뿔이 돌덩이처럼 굳어
이름 하나를 거기 심을 때까지
새로운 뿔이
산 허공에 돋아, 속울음 같은 피로 보름달을 치받던 때
도 있으리라
자라지 않는 이름을 키우다 숨진
쓸모를 놓친 도장들 서랍째 뽑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자식들
남겨진 아비의 쓸모만을 갖고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여전히 뿔 속에서 피가 도는 이름의 아비들,
석양을 바라고 산비탈에 있던 산양처럼
그 산양이 내려놓은 뿔 가지 하나처럼
몸은 없고 이름만 붉은 입술로 남아
누군가의 간절한 기억에 입맞추고 싶은 망자들,
추운 날 오일장 한 귀퉁이에서 뿔도장을 새기는
사내가 있다
살아서 짧게 새기고 죽어서 오래 버티리라
옛집의 낡은 서랍 속에서 남겨지 옥구슬처럼
제 이름의 뿔도장이 구르는 소리, 그 작은 기척에
저승 귀를 토끼처럼 세우고 소리의 배를 채우러 오는
망자들 있으리라
-남겨진 아비의 쓸모만을 갖고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여전히 뿔 속에서 피가 도는 이름의 아비들....
이 대목에서 깊은 한 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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