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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김수근展을 준비하며

shiwoo jang 2006. 6. 2. 10:10

지금 여기, 김수근展을 준비하며

인터뷰 : 윤상진(아르코미술관 수석큐레이터) 

 

# 전시 오픈을 코앞에 두고 있다. 2006년 아르코미술관에서 가장 야심차게 준비한 전시라 들었는데, 어떤 전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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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새로이 시작한 스페셜포커스로 건축가 김수근을 조명해 보려 한다. 그간 아르코미술관에서는 해마다 대표작가초대전을 통해 주로 시각예술작가와 작품을 집중 조명해왔는데, 스페셜포커스에서는 순수미술장르 외 연극이나 영화, 무용, 전통 분야 등 타분야에까지 확대시켜 문화예술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이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장을 마련한다. 대표작가초대전과 스페셜포커스는 격년으로 번갈아 진행할 계획이다.

▶윤상진 (아르코미술관 수석큐레이터)

 

# 미술관에서 조명할 시각예술작가들도 적지 않을 텐데, 그 범위를 확장시킨 이유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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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이 위치한 물리적 환경과 현대미술의 사회적 환경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한 때 우리 미술관이 위치한 이곳 대학로에도 수많은 화랑과 미술공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거나 빠져나가고 아르코미술관만 남아 있다. 연극과 공연의 중심지인 대학로에서 우리 미술관이 ‘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역으로 공연관객층까지 새로이 겨냥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야 할 시점이 아닐까. 그리고 점점 다원화되고 복합화되는 예술환경 속에서 시각예술작가들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측면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야 우리 미술관에도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 건축가 김수근에 특별히 주목한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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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미술장식품, 도시환경 등에 관한 담론이 무성한 때이다. 이 모든 걸 아우르는 게 건축이 아닐까. 건축문화를 시각예술의 한 부분으로 보느냐, 혹은 공학 개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미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봐도, 미술의 시작을 건축에서부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건축에 있는 벽화나 조각들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갤러리나 시장으로 조각조각 뜯어져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건축이야말로 전체 시각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장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 보면 김수근, 김중업 등이 위치해있다. 특히 올해는 김수근 선생 타계 20주기고, 선생이 창간했던 당대 미술문화와 건축의 담론을 담아온 ‘공간’지 창립 40주년이기도 해 여러 가지 면에서 기념비적인 해라 건축가 김수근을 조명하게 되었다.

 

# 건축을 어떻게 전시로 풀어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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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수근을 전시를 통해 만나면서 새로운 소통을 경험했다. 김수근 선생은 건축계뿐만 아니라 공연계 등 여러 측면에서 조명이 가능하고, 인간으로서의 김수근도 매우 매력적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건축가 김수근을 존중하되, 건축뿐 아니라 그 외 여러 문화예술활동도 중요하게 주목하려 했다.

우선 건축을 비주얼화하는 다양한 방법들 - 드로잉과 스케치, 모델링과 사진 중에서 사진을 택했는데, 김수근 선생 곁에는 오사무 무라이라는 특별한 사진작가가 있었다. 그는 김수근 인생과 함께 하며, 김수근의 모든 작품을 사진에 담아왔다. 그분 집에 남아 있던 모든 사진자료 덕분에 이번 전시에서는 오사무 무라이의 카메라 앵글을 통해 김수근 건축을 하나의 패턴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아래 전시장에서 공사소리가 요란하다. 특별한 것을 설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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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건축가 김수근은 공연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공간사랑’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공연예술인들을 데뷔시켰고, 직간접적으로 예술가들의 활동을 후원해 왔다. 그의 사후 제정된 ‘김수근 문화상’은 건축가뿐만 아니라 공연, 미술 작가들을 발굴 후원해 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너무 딱딱한 건축전시로만 흐르지 않게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는데, 옛 ‘공간사랑’을 재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제1전시장에 공간사랑의 무대를 재현하고 그 취지를 살려 전시기간 내내 여러 인디밴드 등 공연을 올릴 예정이다. ‘김수근 문화상’ 수상자들의 현장 인터뷰도 공간사랑에서 만나볼 수 있다.

 

# <지금 여기 Now and Here> 라는 전시제목은 어떤 의미에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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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같이 준비한 김수근문화재단에서 지은 이름이다. 건축가 김수근은 떠났지만, 그가 만든 건물은 여전히 현존하며 지금 현재 우리가 선생의 작품 아래에서 호흡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여기 김수근, 그가 남긴 건축, 지금은 어떻게 보여지고 있는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건축 문화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기도 하다.

얼마전 어린이 관련 전시를 준비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했더니 아파트를 그리더라.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삼각형 지붕에 굴뚝이 있는 집을 그릴 거라 생각했건 거다. 한편 이해도 가는 게 요즘 아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는 게 아파트이고 문밖을 벗어나도 아파트 뿐이다. 이 아파트 문화는 충분히 미학적으로 도시환경을 고려해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그러니 아이들의 눈에는 '집'과 '건축'이 아파트이지. 건축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의 문화선진국들을 보면 알바 알토나 가우디 등 한 나라를 대표하는 건축가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나라는 현대건축의 뿌리에 대한 인식 및 그에 대한 정리, 홍보가 아주 부족한 현실이다. 심지어 김수근과 박수근을 구별 못 하는 이들도 많다. 스페인 빌바오 뮤지엄은 프랭크 게리가 지은 건물인데, 전세계에서 그 건물을 보기 위해 그 도시로 몰려든다. 건축가 한 명이, 건축 하나가 한 도시를 살리는 이같은 예를 보더라도 그 나라가 자랑할 만한 건축가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 건축가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 그러고 보니 아르코예술극장과 아르코미술관도 김수근의 건축이다. 이번 전시 기간 중에는 아르코예술극장과 아르코미술관이 그대로 전시품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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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미술관은 앞으로도 100년 이상 생존해 나갈 것이다. 건축가 김수근의 다양한 고민들이 녹아 있는 아르코미술관은 앞으로 한국미술사에 길이 남지 않을까. 대학로의 랜드마크로 인식되어 있는 붉은 벽돌, 아르코예술극장과 아르코미술관은 외부에서 쌍둥이로 보일 정도로 서로 유사하게 보이는데, 앞으로 극장과 미술관은 함께 대학로의 문화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 우리 건축 문화를 되짚어볼 수 있는 훌륭한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6월 7일 전시 오픈을 기대하겠다.

 

 

일러스트 : 아르코예술정보관 최남식 

 

 

 

 

 

 

 

내가 본 김수근, 건축가 김수근

인터뷰 : 승효상(건축가) 

 

그러니까 제가 처음 김수근 선생님을 만난 게 1974년 여름이었어요.

같은 과 친구 아버지가 김수근 선생과 친구분이라 친구들 여럿이서 같이 만나 뵐 기회가 있었지요.

처음 뵈었는데 카리스마가 화악 느껴지더군요.

속으로 대단하다 생각하면서 인사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갑자기 “야, 자장면 먹고 가야지” 하면서 불러 세우셨어요.

참 매력적인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 승효상 (건축가)

 

사실 처음엔 김수근 선생님 문하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요. 졸업 후 유학갈 생각이었죠.  유신 반대로 데모를 하던 때라 수업도 별로 없어서 학교에도 잘 안 나갔죠. 그런데 졸업 전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는데 김희춘 선생님이 졸업하고 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런데 저한테는 안 물어보시는 거예요. 학교를 하도 안 나가서 나를 잊으셨나 보구나 하고 속으로 슬퍼했지요. 그런데 강의실을 나가시면서 “승효상군은 내 방으로 좀 오게” 그러시는 거예요. 오오~ 깜짝 놀랐지요. 방에 들어가 앉기도 전에 “자네는 김수근한테 가지그래” 그러시더군요. 물어보시는 것도 아니고 단도직입적으로 그러셔서 몹시 놀랐지만, 감격스러워서 금방 “예, 그러겠습니다” 했는데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거시는 거예요. “이러이러한 애가 있는데 보낼 테니 좀 써주시오” 그렇게 해서 유학을 접고 김수근 선생님 문하로 들어가게 됐지요.

김수근 선생님은 건축가 김수근으로 불리는 게 가장 영광스러운 호칭이고, 또 당연히 그렇게 불러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오셔서 건축을 하려 하셨을 때 국내 환경은 매우 열악했어요.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요. 좋은 건축을 하려면 그런 부분을 많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건축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어요. 건축전문잡지도 만드시고, 예술가들 후원도 많이 한 결과 타임지에서 선생님을 한국의 메디치 로렌조라고 표현했죠(사진). 제가 보기엔 혼자 가슴앓이를 하시면서, 좋은 건축을 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하시는 걸로 주변정리를 하셨던 것 같아요. 선생님은 55세로 돌아가셨는데 그 나이면 건축계에서는 요절입니다.

내로라하는 건축계 거장들 대부분이 7~80이 되어서야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얼마 전에 일본의 거장 건축가 겐조가 90에 죽고, 필립 존슨은 거의 100살에 죽었는데 55세면 반밖에 못 산 셈이지요. 지병이 있긴 했지만, 그 지병은 시대가 가져다준 병이지 개인의 지병이 아니에요. 결국 그 스트레스, 가슴앓이로 요절하신 거죠. 그 바탕 위에 우리가 있는 셈이에요. 굉장히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때까지 건축은 형태예술로 인식했는데 김수근 선생님이 처음으로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하셨어요.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벽이나 천장, 바닥은 결국 공간을 한정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지요. 한국의 첫 현대건축가인 셈이었어요. 귀한 역할을 하셨지요.

유작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닙니다. 건축 이력 25년 동안에 50여 개를 남기셨어요. 1년에 두 개 정도밖에 안 하신 거죠. 리스트에 있는 건 100여 개이지만 어떤 건 계획안이고, 지어지지 않은 것도 있고, 할 수 없이 못하신 것도 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워낙 주옥 같은 작품들이라 굉장히 많은 건축물을 남기신 것처럼 인식이 되지요.

제가 처음 선생님의 건축 작업에 참여한 게 마산성당입니다. 제 나이 스물다섯이었지요. 그 후 연이어서 경동교회와 청주박물관 작업에 참여했어요.

선생님이 80년도에 돌아가시자 제가 ‘공간’의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공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선생님보다 더 김수근적인 건축을 하기 위해 애썼지요. 그런데 하다보니 이게 김수근 건축인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선생님을 욕되게 하는 건 아닌가 회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안 되겠다하고 89년도에 독립을 했지요. 그러고 나서 이제 승효상 건축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승효상 건축이 뭔지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찾아낸 ‘빈자의 미학’이란 개념을 건축의 화두로 삼고 처음 설계한 게 수졸당입니다. 이 수졸당으로 4회 김수근 문화상을 탔습니다. 수졸당은 승효상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사실 김수근 선생이 가르침을 주셨던 공간에 대한 문제가 절실히 녹아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축을 문화라기보다는 부동산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 같아요. 자기가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 재개발된다고 확정되면 ‘경축’ 플래카드를 내걸어요. 자기가 살았던 집이 허물어지는 것은 자기의 기억이 없어지는 거고, 자신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인데 그걸 기뻐합니다. 그런 것들에 우리는 절망하는데, 김수근 건축을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도 철저히 반대를 하는 겁니다. 건축을 재화로 보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어요. 최근에는 세이장(洗耳莊)도 허물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거 참.

요즘 젊은 건축학도들이 김수근 선생님의 이름을 모르는 것을 최근에 알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외국 건축가 이름은 줄줄 꿰면서 말이죠. 전에 어떤 스페인 건축가가 그럽디다. 자유센터를 보더니 스페인에 이런 건축이 있었으면 책이 스무 권은 나왔겠다고 탄복을 하던데... 우리는 김수근 건축을 구시대 부동산쯤으로 알고 그냥 파괴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김수근 선생님의 작업도 훌륭하지만 저는 그 안에 담긴 생각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과연 김수근이 어떤 사람이었나 이번 전시를 통해 되짚어보고 되살려보면 좋겠어요. 전시회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제게 건축이 뭐냐고 하셨지요? 우리 때는 동료, 친구들이 반정부 데모에 앞장서다 투옥되곤 했어요. 저는 제 분노를 건축에 풀었어요. 건축을 하지 않았다면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듯 존재 이유를 찾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을 만큼의 분노를 항상 품고 사는 게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고요. 그리고 그걸 발견하면 거기에 자신을 담가야지요. 저는 김수근 선생님 밑에서 15년을 바쳤습니다. 적어도 10년 이상 어느 한 길에 푹 빠져 썩고 문드러져야 자기 길을 찾을 수 있어요.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내가 본 김수근, 로렌조 김수근

인터뷰 : 오태석(연극연출가) 

 

저도 그 당시 ‘공간사랑’이 공연장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개관공연을 김정옥 선생님이 하셨지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한 일년간 연극을 안 하다가 다시 하게 되면서 제가 처음 들어가게 되었죠.

<춘풍의 처>라는 작품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라면박스에 집어넣은 지저분한 소품들이 많았어요. 김수근 선생을 아직 뵙지 못할 때였어요. 공연을 하려고 처음 공간사랑에 들어갔더니 좌석이 전부 박스로 되어 있었어요.

 

▶ 오태석 (연극연출가, 목화레퍼터리컴퍼니 대표)

 

그래서 가변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 좌석을 기역자로 다시 배치했죠. 자리를 다 만들고 한쪽에 멍석을 깔고 막 연습을 하려던 차였어요. 아마 퇴근시간쯤 되었던 것 같네요. 그때 김수근 선생님이 오셔서 좌석배치 해 놓은 걸 보시더니 “어? 이게 바로 공간사랑의 의도인데?” 하시는 거예요. 공간 사옥 전체가 흙벽돌로 되어 있지만 그 구조는 한옥이라는 거죠. 입구는 큰 대청이나 마찬가지이고, 공간이 사통팔달 뚫려 있어서 바람이 맘대로 왔다갔다 하는 구조, 아래는 멍석이 깔려 있고, 그런 데서 노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첫날 총연습 할 때 내내 지켜보시더라구요. 그러고는 한 이삼일 뒤에 사원더러 모두 구경하라고 해서 건축 관련 직원들이 모두 와서 구경했지요. 공연 끝나고 쫑파티를 하는데 그땐 아주 빈곤할 때라 겨우 두꺼비 몇 마리 놓고 먹었는데, 김선생님께서 양주 두 병을 보내셨더군요. 그 후로 제게 굉장히 잘해 주셨어요. 공간사랑만 가면 “아, 미스터 오!” 하며 반겨주셨죠. 그 다음부터 거기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약장사>도 하고 <1980년 5월>이라는 작품도 하고.

‘공간사랑’이라는 극장 자체가 큰 사랑방, 큰 대청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 곳에서 지금 사물놀이하는 친구들과 공옥진 선생님의 공연도 시작되었어요. 우리의 전통이 새로운 옷을 입으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곳이었지요. 꼭 연극만이 아니라 춤과 소리, 사물놀이패의 장단까지 조그만 용광로에서 부글부글 끓어서 지금 입맛에 맞게 재창조되었다고나 할까요. 그곳에서 불씨가 이어져 지금의 꽃이 피게 된 뿌리가 ‘공간’이에요. 당신이 키우셨던 작은 불씨가 이십년이 지난 지금 곳곳에서 큰 덩어리가 되었으니까요.

 

저는 김선생님을 만나 제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어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간사랑이 크기는 작았지만, 누구나 목마른 사람이 올 수 있는 우물터였고,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소중한 자리였지요.

<춘풍의 처>를 선생님이 한 세 번 네 번을 보신 것 같아요. 같은 작품을 계속해서 말입니다. 그분이 인정해 주셔서 큰 의지가 되었어요. 지금도 가끔 선생님이 이걸 보시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생각하지요. 공간사랑에 드나들던 다음 해 79년도에 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일년 동안 미국에 보내주게 되었어요. “선생님, 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했더니 “어이, 미스터 오! 담배 사 태워!” 하면서 여행자 수표를 주시며 등을 툭툭 쳐주셨죠.

이번 전시 기간 동안 공간사랑을 재현해서 젊은 공연가들이 계속 공연을 한다고 하셨죠? 그 젊은 예술가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군요. 그 공간은 계속 불씨가 타올라야 하는 곳이에요. 아침에도, 샛밥 낼 때도, 저녁에도 항상 타올라야 하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 열정에 대한 불씨를 꺼뜨리지 말고 계속 그 불씨를 이어가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 <춘풍의 처>, 2000

 

글을 쓰거나 작품을 만들 때 마음의 표상으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일차로 관객을 상정하고 글을 쓰고 연습을 하지만 좀 막연하잖아요. 그러나 꼭 몇 분, 우리를 등너머에서 넘겨다보시는 분들이 있지요. 그 분 중에 김선생님도 틀림없이 계시는 거예요.

너무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냥 가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자료 및 사진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미술관

 

 

<공연예술단체 집중육성지원> 에 선정된 단체 중 네 개 단체를 집중 조명해보는 연작 중에서, 지난 21호 집중포커스 ① ‘음악극 집단 바람곶’ 원일 대표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댄스시어터온’의 홍승엽씨를 취재하였다.

 

집중포커스 ② ‘댄스시어터온’ 홍승엽 대표 인터뷰

글 : 김승현(문화일보 문화부장)

 

현대무용가 홍승엽씨가 이끄는 댄스시어터온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김병익)가 의욕적으로 실시한 첫번째 ‘공연예술전문단체 집중육성지원 사업’ 지원대상자로 뽑혔다.

 

이 사업은 예술위원회가 문자 그 그대로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집중육성 사업’. 그동안 문화예술 지원이 소액다건(少額多件),

시쳇말로 ‘면피주의’였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것을 ‘선택과 집중’, 다액소건(多額少件)으로 고치고자 많은 사람들이 무던히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무래도 정부 산하기관인 과거 문예진흥원 체제로서는 공평에

우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집중’을 하면 뒷말이 나오기 마련이고, 뒷말이 나오면 공직자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선 소액다건의 무사안일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 홍승엽 (무용가, 댄스시어터온 대표)

 

또 여기에 참여하는 민간 심사위원들로서도 굳이 불편할 리 없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을 게다.

그동안 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은 이 같은 바탕에서 예산 회계 연도에 따른 단년도 지원방식과 개별 사업 및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 위주로 운영돼왔다. 그러나 이번 ‘공연예술전문단체 집중육성지원 사업’은 예술단체를 집약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다년간 지원과 단체운영을 지원하는 방식을 과감히 시도, 지원대상 단체들에게 연간 5000만원에서 1억 5000만 원씩 3년 간 계속 지원하는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댄스시어터온이 매년 1억 원씩 3년 동안 이 사업의 지원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좀 의외였다. 댄스시어터온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홍씨의 ‘전비(前非)’ 때문이다.

홍씨는 2004년 예술위원회를 탄생시킨 문예진흥원 마지막 원장 현기영 체제가 어렵게 복권기금 30억여 원을 따와 마련한 ‘올해의 예술상’을 거부, 파문을 일으켰다. 본인의 의도야 어쨌건 이 상을 마련한 문예진흥원 측이나, 그를 뽑은 심사위원들이나, 다른 수상자들이 여간 불편해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급기야 복권기금측이 올해부터 지원예산 30억여 원을 삭감하기도 했다. 주는 쪽에서 어렵게 지원하는 돈인데 구설수에 올라가며 줄 필요는 없다는 거다. 예술위원회로서도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업을 시행 2년 만에 지원금이 떨어졌다고 폐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올해부터 예술위원회의 기금에서 지출하고 있다. 문화예술계쪽의 중요한 재원 하나가 없어졌다고 홍씨는 물론이고 무용계에 대한 전체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예술위원회가 그의 단체를 ‘집중지원’ 대상으로 선정, 1년 만에 전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은 인간관계를 특히 중시하는 한국 문화예술계 풍토에서 분명 의외라면 의외다. 사실 그 파문 이후 홍씨는 지난해 문예진흥기금을 포함, 거의 모든 공공 지원기금에서 탈락하는 등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본인이 신청을 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신청을 했어도 엄격한(?) 평가기준에 미달돼 떨어졌겠지만 다수 심사위원과 기금관리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집중지원사업 대상자 인터뷰 두 번째로 홍씨를 선택, 그의 서울 중곡동 지하 사무실을 찾았다. 먼저 그동안의 마음고생에 대해 묻자 그는 “남들이 생각한 만큼 심하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각오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편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선정방법이 많이 개선됐습니다.

그래도 시행착오는 있겠지만 계속 개선돼 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술가를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돼야 합니다.”

홍씨는 “2005년 신작은 바로 이 연습실(의 완성)”이라며 지난해 거둔 가장 큰 성과로 기존의 5층 연습실을 지하로 옮긴 것을 꼽았다.

이와 관련 ‘5층에서 지하로 떨어진 것이 홍씨의 현재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냐’고 꼬집었더니 손사래를 쳤다.

“경제적 부분도 있지만 실용적 부분이 더 컸습니다. 세도 싸고, 공간도 넓고 높아졌습니다. 환기도 잘 돼 오히려 1, 2층보다 냄새도 없고 습기도 없습니다. 집중력도 생기고 정말 잘 내려왔다는 생각입니다.”

그가 단원들과 함께 꾸민 공간은 공학적으로 깔끔해 그가 원래 공학도였던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홍씨의 자랑대로 댄스시어터온의 ‘2005년 신작’이라고 할 만큼 예쁘고 정이 가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너무 편안해 보이는 그에게 좀 어깃장을 놨다. ‘당신의 고집 때문에 문화계 모두의 예산 30억여 원이 날아갔다. 미안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받아치는 말이 물어본 사람을 낯부끄럽게 했다.

“어떤 사람들이 마치 그 사건이 그렇게 돼서 예산이 없어졌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렇다면 그것은 국가적 수준의 비극입니다. 그런 일로 몇 십억 원의 문화예산이 바꿔진다면…(그는 좀 흥분, 기가 막힌 듯 아니면 가슴속에서 나오려는 심한 말을 꾹 참으려는 듯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그런(자신의 행위로 인해 예산이 없어졌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말은 별로 고생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과거의 그라면 거침없이 털어놓았을 말을 한 템포 죽이며 필터링하는 것을 보니 상당히 마음고생을 했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말인즉슨 그의 말이 옳다. 한 나라의 중요한 문화예산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없어진다는 것도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식으로 문화예산을 늘리고 줄였다면 정말 우리 문화예술인을 이 정부, 위정자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반문해 볼 일이기 때문이다. 정말 홍씨의 행위로 인해 예산이 사라졌다면 이게 뭐 구멍가게 텃세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문화도, 정책도 없는 ‘슬픈 나라’라는 생각도 든다.

향후 매년 1억 원씩 3억 원이라는 ‘큰 돈’을 어떻게 쓸 것이냐고 물었다.

“지원을 받을 때 위원장님이 ‘이 지원은 작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확인해 주셨습니다. 단원들에게 월 20만 원 정도씩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차비를 줄 예정입니다. 그렇게 하면 벌써 절반은 나가요. 그리고 나머지로 작품을 하나 제대로 만들어 볼 겁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평가받는 자아도취적인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주는 작품을 만들 겁니다.”

듣고 보니 그 ‘큰 돈’이 단원 1인당 매월 20만 원 정도밖에 안 돌아가는 ‘푼돈’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는 고맙게 생각했다. 세상이 발전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는 “앞으로 좋은 레퍼토리를 계속 개발, 관객들에게 돌려주는 작품을 해 기업에게도 이익이 되는 투자를 끌어들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를 위해 “이번 지원은 아주 소중한 기초”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20년쯤 후면, 댄스시어터온이 완전히 자립, 재생산을 위한 아카데미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과정이야 어쨌든 이번 집중지원 대상에 홍씨가 선정된 것은 정말 잘 된 일인 것 같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모두가 자신의 철학대로 자신의 길을 갔고 그것을 서로 인정, 중용의 지점에서 합의를 끌어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지원 주체가 텃세 부리지 않고, 지원 대상도 허세 부리지 않는 등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모두 승리하는 아름다운 톨레랑스(tolérance)의 시범 케이스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김수근, 승효상은 제가 좋아하는 건축가랍니다. 아르코 웹진에 올려진 소식에 기사가 있어 옮겨왔습니다. 누구든 시작한다는 것과 그 시작을  시작이게 하는 것이 귀하고도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더 마음이 가나봅니다. 군더더기 없는 건축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이야말로 참 건축이 아닐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