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철학자의 사회'…'희망의 인문학'은 없다! [프레시안 books]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 기사입력 2010-10-08 오후 7:23:08 1 자신이 대단한 아이디어 뱅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있다. 그는 선출직 공직에 당선된 직후부터 본인의 '끼'를 마음껏 발산해왔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날이 갈수록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고, 그래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선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대번 대답했다. "쌀로 국수를 만들어서 먹으면 되지!" 이 선출직 공무원이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쌀 생산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는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통용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이익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으로 갈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는 '아이디어'만을 내놓는 그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찼다. 2008년 초,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논리 구조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에서도 사실상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쌀농사가 힘들면 쌀국수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처럼, 인문학이 위기라면 '희망의 인문학'을 하면 되지, 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논리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한 위기 앞에서 '시장성'의 재고를 강조하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 담론들의 모습이 더욱 문제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그 위기에 대한 이 반응만큼은 분명히 한국적이며, 그 자체가 사실상 더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좀 더 풀어놓기 위해서는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고병헌 옮김, 이매진 펴냄)을 펼쳐들 필요가 있다. '희망의 인문학'은 현재 대한민국의 인문학 관련 논의에서 '지배 담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문학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대학의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 자신의 효용을 적극적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내용을 그 골자로 놓고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애초에 노숙인을 상대로 제기된 그 발상은 이제, 당장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취약 계층뿐 아니라 대기업 CEO까지 모든 사람들이 어떤 '쓸모'를 위해,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을 잘 벌기 위해 인문학을 배워야만 한다는 수준으로까지 격상되어 있는 지경이다. 가령 <프레시안>에 실린 고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의 칼럼 제목은 "돈 벌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을 공부하라"였다. 이와 같은 발상이 버젓이 매체의 지면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있었던가? 대학생들은 "인문학도 스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스티브 잡스 같은 CEO나 그런 이들을 동경하는 직장인은 "인문학을 접목한 아이템이 히트 친다"는 발상 하에, 인문학에 대한 게걸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시절이다. 한국연구재단 역시 2006년부터 '열림과 소통'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매년 일주일씩 '인문 주간'을 진행한다. 인문학으로 뭔가 '쓸모 있는 일'을 하겠다는 발상은 가히 모든 이들에게 상식처럼 공유되고 있다. <희망의 인문학>이 이런 모든 변화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인문학'과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들의 지형을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른바 '강단 인문학'에 대항하는 개념, 즉 '희망의 인문학'을 제시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2 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사는가? 이 해결되지 않는 질문 앞에서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인 얼 쇼리스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라고 정의내린 후, 그는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층의 삶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55쪽)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참석한 향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리스토데모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길 위에서 만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액자 형식의 작품인 <향연>에서, 정작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여사제 디오티마였듯이, 얼 쇼리스 역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어떤 여성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그는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제소자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어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그 핵심적인 부분을 펼쳐보자. 비니스는 대화의 주제가 실제로 자녀 문제로 넘어갈 수 있도록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빠르지만 리듬감 없는 어투로 입을 얼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moral life of downtown)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 "그렇게만 하면, 그 애들은 더는 가난하지 않게 된다니까요!" (…) "길거리에 방치된 그 애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168쪽) 일반적으로 볼 때, 가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노동이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혹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적·도덕적 고양. 클레멘트 역시 그와 같은 긍정적 효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무력(force)'에 의해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하면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하는 노동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으며, "그런 식의 노동은 또 다른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점점 더 심해져 가"(117쪽)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해법은 노동 혹은 노동운동을 통한 단결이 아니다. 중산층과 같은 정서적·도덕적(moral) 힘을 기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부유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결론을 정당화한다. 내가 만났던 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모두 무력의 포위망에 대해 일종의 창조적 대항, 적극적 대응을 했으며, 이것은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보다는 운명에 대항하는 자유의 성장과 더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161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 주목해보자. 얼 쇼리스는 1990년대 미국의 상황 속에서 노동운동을 통한 단결과 노동 조건 회복 및 정서적 고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인문학'을 통해 개인이 그 유연화된 노동 속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노동의 유연화는 불가항력이지만 그 속에서 '자력 구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얼 쇼리스와 '희망의 인문학'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1970년대 이후의 신보수주의와 기본적인 맥락을 공유하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3) 계속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클레멘트 코스의 역사를 마저 개괄하기로 한다. 이와 같은 사상적 기반에서 출발한 클레멘트 코스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졸업 뒤 6개월이 지났을 때 정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두 가지 다 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는 "뉴욕 라디오 방송국에 비정기적으로 원고를 쓰면서 바드 대학에 다시 한 번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269쪽)었다. 책에 따르면, 클레멘트 코스를 이수한 17명의 졸업생들은 정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정규직이 되었다. 예외는 단 한 명뿐인데, 그나마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발적 실업'에 속한다. 빈민들이 개인적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이 책 <희망의 인문학>에 등장하는 사례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고 모범적이다.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일군의 사회운동가 및 학자들이 한국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운영 중이다. 성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글쓰기 교수인 최준영에 따르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인 성프란시스 대학의 1기와 2기 졸업생 20여 명 중 대부분은 노숙 생활을 청산했으며 "앞으로 최소한 자기 자신만큼은 책임지는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하기) 개인적인 자립은 한낱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다. 얼 쇼리스의 책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빈민들이 합법적 권력의 범주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러고 나서 게임의 잔혹성과 맞선다면, 그들은 기존에 확립된 사회 질서에 진정한 위협이 될 것"(428쪽)이라고 확신한다. 자존감을 회복한 빈민들이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위험'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얼 쇼리스가 주창하는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에 맞서 현재 진행 중이다. 3 얼 쇼리스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 줄여서 '스트라우시안'(Straussian)들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해 대단히 큰 경외심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플라톤을 열심히 읽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비의적(秘儀的)인 방식으로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사상을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한들,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내용이 플라톤의 텍스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을 그렇게 해석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제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앨런 블룸(Allan Bloom)이며 그와 얼 쇼리스는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 얼 쇼리스는 회상한다. 블룸 교수와 나는 4년 동안의 대학 교육과정 대부분이 '위대한 고전들(Great Books)'을 읽는 것으로 구성된, 허친스 총장 시대의 시카고 대학교를 다녔다. (…) 레오 스트라우스(Leo Staruss)는 블룸 교수를 우파로 끌어들였고, 이 세상은 나를 좌파로 인도했다. (186~187쪽 각주) '희망의 인문학'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스트라우시안 좌파'의 작품이다. 앨런 블룸은 <미국 정신의 종말>을 통해 인문학을 통한 고전 교육이 선택받은 엘리트의 전유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얼 쇼리스는 비판한다). 얼 쇼리스는 그 프로젝트의 거울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을 통한 '개인'의 육성과 도야라는 측면에서 앨런 블룸과 얼 쇼리스의 생각은 같다. 다만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논의가 나누어지고 있을 뿐이다. 앨런 블룸은 스트라우스의 뜻에 따라 비의적 텍스트의 저술가인 플라톤을 숭배한다면, 얼 쇼리스는 바로 그 플라톤의 손아귀에서 진정한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구해내고자 한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변명(Apology)>, <크리톤(Crito)>의 일부분, <파이돈>에서 몇 쪽, 아마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을 것입니다." (234쪽) 왜 얼 쇼리스는 '변명', '크리톤' '파이돈'의 '몇 쪽, 일부분'만 읽으려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플라톤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서 그의 의도는 너무 극명하게 드러난다. 플라톤에서 시작한다면서 플라톤의 독창적인 영역은 건드리지도 않는다. 보다 못한 디오티마, 아니 비니스가 한 마디 첨언한다. "뭔가 빠뜨린 게 있는데요." (…) "'동굴의 비유'요. 그걸 빼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철학을 가르치려고 하죠? 동굴이 바로 빈민 지역이고, 빛이 교육인 거죠. 가난한 사람들은 분명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234~235쪽) 쇼리스가 플라톤의 핵심 저작인 <국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인 '동굴의 비유'를 빼놓았던 동기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중기 대화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는 전적으로 플라톤의 작품일 뿐 소크라테스의 실제 행적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니스가 올바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대가 가난한 사람들이건 아이비리그의 귀공자들이건) 플라톤 철학을 가르치면서 동굴의 비유를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얼 쇼리스가 플라톤, 혹은 플라톤을 비의적으로 해석하고 숭배하는 앨런 블룸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스트라우시안 우파'와 '스트라우시안 좌파'의 대립으로 바라보지 않는 한 쉽게 인식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열광, 근대 및 근대 철학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반감, '정치적 삶'에 대한 강조 등, 얼 쇼리스는 자신이 증오하는 앨런 블룸과 매우 많은 지점을 공유한다. 동시에 그는 그로부터 비롯한 문제점들도 함께 가져갈 수밖에 없다. 앨런 블룸이 플라톤을 비의적 엘리트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적인 것처럼, 얼 쇼리스가 플라톤의 저술에서 오직 소크라테스만을 읽어내는 것도 온당한 독해의 방식은 아니다. 얼 쇼리스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바를 살펴보면 인문학에 대한 그의 입장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을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소크라테스, 혹은 인문학을 배워 '힘'을 얻게 된 사람에 대한 영웅주의적 묘사와 숭배는 에인 랜드의 <아틀라스>와 같은 작품들의 영향을 고려할 때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 가능하다. 앨런 블룸의 것과는 다른 방향이지만, 어쨌건 '희망의 인문학' 역시 어떠한 종류의 '미국 정신'인 것이다. <희망의 인문학>에 내재된 인문학적 시각은 결코 그 자체로 지적 권위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희망의 인문학'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헌신과 열정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얼 쇼리스가 제시하는 인문학에 대한 관점은 전적으로 옹호되기에는 무리가 많다. 우리가 정말 인문학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면, 얼 쇼리스의 '인문학' 역시 그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4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의 내면적 주체성을 북돋워줌으로써 그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인문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하고 있을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왜 '희망의 인문학'이 승리하는 가운데, 인문학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여 목숨을 끊고 병에 걸리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클레멘트 코스를 수강하는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에 푹 빠져 산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마찬가지이다. 매우 기초적인 삼단논법에 따라 생각해보자. 대전제 :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힘'을 가진다. 소전제 : 인문학자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결론 : 인문학자는 '힘'을 갖는 사람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 반대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솟아오르는 동안, 정작 인문학의 근간이 되는 연구를 수행하는 소장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문자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7월 4일 세상을 뜬, 대표적인 하이데거 전문가 고(故) 신상희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하이데거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번역해온 사람으로, 후기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숲길>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하지만 대학들은 인문학 교수의 정원을 줄여나가기만 할 뿐이었고, 그는 늘 교수 임용에서 고배를 마셨다. 오랜 절망 끝에 헤매던 그는 50세의 이른 나이에 심장 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고 신상희의 "아내는 남편의 깊은 사색 저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오랫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 대신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들이 인문학과의 정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문학 연구자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문학 교수들의 철밥통이 깨지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지금까지 인문학자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잃었고, 그 결과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 혹은 훈수도 빠지지 않는다(앞서 인용한 고원 교수의 "돈 벌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을 공부하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문제의 원인을 그와 같이 파악한다면, 클레멘트 코스와 같은 대중적인 인문학 강연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사실이 그러할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클레멘트 코스에서 전제하는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도록, 그와 같은 목적으로 편집된 인문학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인문학적 관점이겠지만 그것이 전체 인문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인문학이 대중들의 삶에 희망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희망의 인문학'을 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갈 때, 고 신상희와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해 인문학을 교육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을 때, 나치에 협력한 혐의를 안고 있는 하이데거만을 연구해온 사람과 그의 작업들은 어떻게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얼 쇼리스의 입장과 같은 '하나의 인문학'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문학이 통째로 사라진 세상만큼이나 끔찍할 수 있다. 모든 인문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가르쳐야 하는 세상은, 모든 철학자들이 신의 은총을 찬미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해야만 했던 중세 시대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애초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의의 프레임 자체가 잘못되었다. 인문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기초 학문의 연구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되는 학문, 돈이 되는 학과로만 정부 및 대학들의 지원이 쏠린다. 해당 분야 내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연구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해외의 연구지에 등재되지 않으면 성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협박이 횡횡한다. 이것은 인문학의 위기지만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다. 기초 학문 전체의 위기를 놓고 연대의 범위를 넓혀나갈 때 비로소, 한국 사회 내에서 대학이 갖는 위상과 그 대학 속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우선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가 너무도 '핫'하게 떠올라버렸다. 그리고는 그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어떤 하나의 인문학적 해석 및 방법론이 마치 모든 문제의 해법인 것처럼 논의되고 주창되고 도덕적 우월성을 지니는 명제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이여, 고매한 상아탑에서 벗어나 대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 얼마나 쉽게 대중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인가. 그리하여 인문학의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 연구실에서 파고들어야만 하는 철학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은 쓸쓸히 잊히고 생계를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5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 자체가 지니는 가치는 쉽사리 폄하될 수 없는 것이다. 학문과 세상이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고, 그것을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책갈피마다 끼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린 '인문학의 위기'는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사태다. 대학이 '돈이 되는' 학문에만 자원을 집중하는 현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 뿐 아니라 모든 기초 학문들이 고사 직전에 몰렸다. 애초에 지원이 부족하던 인문학자들이 먼저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해서 사태의 본질이 오직 인문학에 대한 것으로 축소되지는 않는다. <희망의 인문학>은 그 문제 중 일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체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문제는 오직 이 책만을 혹은 이 책에 대한 소개만을 읽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내뱉는 목소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희망의 인문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촉발된 국내의 담론들은 한층 더 문제적이다. 고매한 상아탑의 학자들이 대중들과 지식을 나누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중, 그 연구자들이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식 나눔', '배움의 공유' 같은 그럴싸한 단어들이 횡횡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과 노력을 들여 얻은 지식을 무료 혹은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배포하라는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을 뿐이다. 얼 쇼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자들에게 무턱대고 지적 자원봉사를 요구할 때,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그는 못을 박는다. (…) 자원봉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름지기 대학 수준의 강의는 자원봉사자가 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 교수들은 일류 대학의 조교수들이 받는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 (23쪽) 인문학 하는 너희들이 지금까지는 너희들끼리만 통하는 소리 하고 시시덕거렸으니 좀 굶어도 싸다, 굶기 싫으면 '소통'해라, 이런 식의 폭력적인 요구가 적어도 <희망의 인문학>에는 담겨있지 않다. 국내에서 시행되는 '좋은 활동'들 중 상당수가 참여자들의 인내와 고통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도 '상아탑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얼 쇼리스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국내에서 통용되는 '희망의 인문학'에 대한 논의에는 이와 같은 현실적 고려가 얼마나 담겨있는가? 필자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쌀농사에 대해 내놓은 '아이디어'를 비판하면서 이 서평을 시작했다. 쌀이 잘 안 팔리면 쌀로 국수를 만들면 되지. 이 발상은 현실성이 없다. 쌀로 국수를 먹은 사람이 또 밥을 먹는 게 아니니까, 전체적으로 쌀 소비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쌀국수를 만드는 쌀과 우리가 밥을 해먹는 쌀은 종(種)이 다르다.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설익은 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바쳐 어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너 고매한 상아탑에서 머물지 말고 '희망의 인문학' 해봐 라고 말하는 것은 농민들에게 벼 뽑고 안남미 심으라고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킬 뿐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에 대한 국내의 담론에서 한 이정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성공과 그 파장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하는 것 자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미약한 빛이 비춰지고 오직 그것만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처럼 이해될 때, 누군가는 굶고 절망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윤리가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 잊지 않고 거짓 해법에 열광하지 않는 것. 인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기억하고 되새기는 학문이니까. 다양한 논의와 해법이 오가는 가운데 진정한 '희망의 인문학'이 도래할 날을 희망한다.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필자의 다른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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