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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_ 조영란

shiwoo jang 2021. 8. 4. 13:32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조영란

 

 

당신을 펼치면 비문의 세계가 열린다

 

단락을 나누듯

짦은 기침 몇 지나고 나면

발작적으로 뛰는 심장이 운율

자리를 바꿔 앉은 감정의 오타 같은 것

 

몇 병의 취기로도 잠들 줄 모르는 기억은

텅 빈 가슴을 채우며 빼곡해지는데

붉게 표시해둔 우울은 성급한 나를 위한 선물이었으리

 

한순간도 당신인 적이 없던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상투적인 농담을 지우고 하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민낯의 그늘

 

행간에 빠진 것은 침묵일까

열릴 결말은 언제 닫힐까

 

쏟아지는 질문 앞에서 나는 자꾸 문맥을 잃어버리고

끝내 마침표를 찾지 못하고

어디쯤에 밑줄을 그어야 하나

 

좀 더 그럴듯한 결핍을 위해

열렬히 실패하며 스스로 정물이 되어버린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당신을 필사해도 되겠습니까, 시인동네, 2021

 

늘 글 언저리에 머무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

당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꾸 흘리고 잃어버리는 나는 못 쓸 시,